그날 나는 미생물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어차피 이번 생에 학점 관리는 망했고, 그때 유행이었던 소위 융합형 인재라도 되어보겠다는 생각으로 환경생태공학과를 이중 전공으로 선택한 것을 후회하면서 말이다. 철저한 문과형 인재로 자라나 고교 시절 제대로 배워보지도 못한 생물이며 화학 공식이 칠판 가득 적힐 때면 난 누구? 여긴 어디?’하는 현타가 스쳐지나가던 기억이 난다. 미생물학 수업 때 내 자리는 늘 왼쪽 맨 끝자리였다. 가장 구석지고 어두운 곳에 위치해 교수님의 질문은 멀고, 그때 공들여 하고 있던 사업 준비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날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트북 밝기를 최대한 줄여 신나게 웹서핑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포털사이트 메인 뜬 속보라는 말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배가 한 척 침몰했는데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들도 많이 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후부터는 속보와 오보의 반복.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종일은 무너진 가슴 쓸어안고, 다시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2014416, 그 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아는 그대로다.

  지난주 목요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시국선언에 참여했던 교사 30여 명이 벌금형 확정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사정을 알아보니 당시 교육부가 선언에 참여한 교사 284명을 국가공무원법상 정치 운동·집단행위 금지 위반을 명목으로 고발했고, 2년 뒤인 201612월에 이들 중 일부가 기소된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193, 교육부가 고발을 취하했지만 이미 뒤늦은 상황. 재판은 취하 여부와 관계없이 이어졌고, 결국 유죄가 확정됐다고 했다.

  이처럼 결정된 사안만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달 25, 세월호 유가족과 단체들이 모여 시작한 사회적 참사 특별법개정안, 세월호 참사 관련 박근혜 대통령기록물 공개 등 세월호 참사관련 주요 안건은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 명을 조기 달성했다. 국회 국민동의 청원은 한 달 안에 10만 명이 동의하면 국회 소관 상임위에서 심사가 이뤄져야 한다. 시야를 조금 돌려 청와대 앞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세월호 사건의 생존자 김성묵 씨가 진실 규명을 위한 대통령 직속 특별수사단 설치를 촉구하는 단식을 진행 중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오늘은 35일째, 만약 그사이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면 그는 37일째 단식 농성을 진행 중인 상황 일터다.

  누구나 아픈 기억은 잊고 싶게 마련이다. 하지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또한 분명 존재한다. 내가 그날의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한 것처럼,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혹은 희생자의 가족, 친지, 이웃, 친구였을 누군가에게는 그날의 일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진실을 밝히고, 억울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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