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가 경비 노동자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가 보여 리모컨을 내려놓고 한참 보게 되었다. 동료들과 속마음을 털어놓는 자리에서 한 노동자는 우리가 죄가 있다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태어나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세대로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세대가 이런 근로환경에 처해 있다는 게 서글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분들의 심정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야 있으랴마는, 그 장면을 보면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더 안타까운 상황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왜일까.

  내가 대학에 다닐 무렵 TTS(Text to Speech) 프로그램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들과 신기함에 경탄했던 게 생각이 난다. 지금이야 웬만한 이북 프로그램만 열어도 책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TTS를 만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입력한 글자를 내가 원하는 목소리로 읽어주는 게 정말로 신기했다.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이라며 음성인식, 인공지능, 기계학습이 실제 사업영역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금융회사 콜센터에 오는 전화의 상당수는 상담원과 통화를 하지 않아도 버튼 몇 개로 고객의 요구사항이 처리되며, 상담원이 전화를 받더라도 해당 고객의 예상 요구사항과 해결방법이 상담원의 컴퓨터에 밀어 넣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갈수록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판단이 도출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이른바 설명할 수 있는 인공지능(ExplainableAI)’ 시대의 도래는 사람이 개입하지 않는 컴퓨터 완결시스템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사람이 필요 없는 영역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보니, 정부가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사업영역들은 일자리 성적표까지 발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정부의 노력으로 당장의 일자리가 얼마나 더 생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억지로 만든 일자리로 인한 인건비 확대는 주주의 이익과는 대치되는 사항이니 지속가능한 대안이라고는 보기 힘들 것 같다.

  100점 만점 암기시험에 99, 98점을 맞으면 탁월함으로 여겨지고 이 사회 어디에선가 유능한 인재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서글픈 이유는 사회경제적 경험도 미약한 주체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지는 상황에 하루하루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엄중한 현실에 걸맞은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지도 의문이 든다. 창과 방패는 주고 나가 싸우라고 이야기하는 게 선배들의 몫인 것 아닌가? 건투를 빈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게 씁쓸하다.

<지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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