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자리 숫자, 얼마인지 한 눈에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액수다. 55579001400만 원, 정부가 편성한 2021년도 대한민국 예산 총액이다.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일부 조정되겠지만, 15자리 숫자와 맨 앞의 ‘5’라는 숫자는 바뀌지 않을 거다. 한 달 생활비를 놓고 1만 원 단위로 따져보는 상황에서 555조 원이라는 국가 예산은 비현실의 영역으로 다가온다.

  납세는 헌법상 의무다. 국민 대부분은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원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직장인들은 매달 각종 명목의 세금이 1원 단위까지 잘 정리돼 있는 급여 명세서와 세금이 먼저 빠져나가고 남은 급여를 이체 받는다. 그러다 연말정산 시기가 돌아오면 한 푼이라도 더 돌려받기 위해 정말 온 힘을 다 기울인다. 수백조 원 단위인 국가 예산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당장 내가 내는 세금은 백 원 단위까지 따져본다. 이렇게 세금 내는 일에는 민감한데, 그 세금을 국가가 어떻게 쓰는 지에는 둔감하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세금은 피 같은 돈이지만, 사실 이 돈이 제대로 쓰이는지 따져볼 여유 따위는 없다. 일반 소시민 처지에서는 내가 낸 돈을 국가가 정말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잘 써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보완 장치를 하나 마련해뒀다. 지금 국회에서 한창인 예산 심사가 바로 그것이다.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대표해 내년도 예산을 심사하는 것이다. 헌법에 따라 국회는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예산안에 대해 심의하고 의결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국민 대표들, 제대로 하고 있을까.

  국회 예산심사 과정에서는 정말 필요한 예산을 모두 감액할 수도 있고, 정말 필요 없는 예산을 새로 편성할 수도 있다. 헌법 제57조에서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한 만큼 정부가 편성한 예산안을 조정하려면 국회와 정부의 합의가 필요하다. 좋게 보면 합의, 다르게 보면 일종의 짬짜미다. 양쪽 모두 서로 원하는 예산을 사수하기 위해 조금씩 양보하며 타협하는 관행이다. 재원이 한정된 만큼 필요성 등 원칙을 정하고 우선순위에 따라 예산을 편성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논리가 끼어드는 것이다.

  2021년도 대한민국 예산안은 조만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확정된다. 그러면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집집마다 홍보물을 보내고, SNS나 블로그에도 게시물을 올릴 거다. 도로 건설 예산을 따왔다느니, 학교 체육관을 짓는 예산을 따왔다느니 비슷한 내용일 거다. 거의 모든 국회의원들이 지역구민을 위해 예산을 확보했다고 자랑할 텐데, 좋아하지 마라. 그거 다 내가 낸 돈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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