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세평] 국사(菊史) 선생을 생각한다
[탁류세평] 국사(菊史) 선생을 생각한다
  • 고대신문
  • 승인 2021.01.2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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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대 글로벌대 교수·한국학 전공
유영대 글로벌대 교수·한국학 전공

  스승이신 국사(菊史) 인권환 선생이 작고하신 지 5년이 지났다. 서관의 양지쪽에 있던 선생의 연구실에 걸린 노란 국화를 그린 문인화가 선생의 이미지를 잘 담고 있었다. 공부를 하면서 마시던 국화차에서 국화 향이 우러나 연구실을 채웠다. 선생의 아호 국사 (菊史), 말 그대로 국화와 역사를 아우른다. 무릇 선비가 갖추어야 할 두 덕목이 아호 속에 담겨있다.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 매서운 서릿발에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하게 피어 우아한 향기 를 내는 꽃이다. 선생은 이런 국화 이미지에 꼭 맞는 그래서 국화와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아호의 다른 축 역사, 우리가 살고 있는 험란한 사회 안에서도 올곧은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선생은 청춘 시절에 4·19를 만났고, 이어서 아주 혹독한 군사독재의 긴 터널 속에서 살아오면서 당대의 관심사를 고전을 통하여 연구했다. 험준한 시대에도 선비의 우아한 품격과 지조를 지켜가겠노라는 의지가 그분의 아호 국사(菊史)에 담겨있다.

  국사(菊史)는 지훈(芝薰) 선생 이래, ‘지조가 강한 선비의 모습을 가진 마지막 학자였다. 선생은 우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폭 넓은 학문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선생은 학부 시절에 평생의 친구 박노준 선생과 함께 <한용운 연구>를 간행하였다. 선생은 아직 학문적 정립이 모호하던 시절, 민속학의 역사를 조선 후기까지 올려서 한국민속학사를 출판했다. 그래서 한국민속학을 정식 학문 분야로 순식간에 이끌었다. 선생은 불교문학에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선생의 반야심경 강해는 깊으면서도 이해가 쉬웠고, 간혹 들려주셨던 알쏭달쏭 한 선시들은 쉬운 듯 심오했다. 선생의 박사 논문은 고려 시대 선승들이 남긴 선시의 철학적 깊이 와 문학적 표현에 대한 탐구였다. 선생이 박사 논문을 쓰던 그해 아주 더웠던 여름, 서관의 연구실에서 늦게까지 고승전(古僧傳)과 선시집(禪詩集)들을 펼치며 글자의 의미를 따지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럼에도 선생 학문 세계의 빛나는 성취는 판소리계 소설, 특히 <토끼전> 연구라고 할 수 있 다. 나는 막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국사 선생 연구실 한켠에서 작은 책상을 놓고, 선생의 삶과 학문을 함께 배웠다. 1970년대 말 엄혹한 군사독재의 절정에서, 교정은 거의 날마다 최루탄으로 뒤덮였고, 우리는 최루탄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어느 가을날 밤 이었다. 그 무렵 선생의 연구실은 교양관 1층에 있었는데, 한밤 중에 선생과 함께 연구실을 나오다가 교정에 가득한 최루탄 냄새를 맡고 멈칫거리게 되었다. 그때 선생은 얼마나 지나서야 이 교정에서 최루탄이 사라질 것인지탄식하셨다. 가을인데도 철모르고 피어있는 개나리를 향해서, ‘최루탄 때문에 철도 모르고 피어난 미친 개나리라고 부르면서, 절망의 시대를 지나면서 지식인이 품었을 고뇌를 슬쩍 토로했다. 선생의 시대에 대한 비분강개는 논문 <토끼전의 서민의식과 풍자성>에 잘 드러난다. 선생이 이 논문을 쓸 때, 고려대학 운동장에는 정치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공을 차고 있었다고 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그것을 증언해야 하 는 지식인의 자세, 이것이 국사 선생의 초상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국사(菊史)의 고대사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고 맹목적인 것이었다. 선생은 움직이는 선이 아주 좁아서, 좋아하던 장소는 연구실, 강의실, 선생이 출퇴근할 때 다니던 오솔길, 시계탑에서 울리는 새야새야 파랑새야차임 벨 소리,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라는 시가 새겨진 호상(虎像) 정도였다. 선생의 유일한 큰 움직임은 친한 벗들과 오징어를 사들고, 동대문 운동장 야구장에 모여서 고대팀을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 모임이 바로 징어회인데, 선생의 소박하면서도 열정이 묻어나는 한 대목의 전설이다. 선생의 다양한 고려대학교 사랑법 을 쓴 책이 바로 <고대유사(高大遺事)>이다. 삼국유사를 패러디하여, 고려대학교에서의 일상 가운데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써 모아둔, 선생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낸 책이다.

  한퇴지는 그의 명문, 사설(師說)에서 슬프다!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嗟乎! 師道之不傳也久矣)”고 말했지만, 내 생각에 스승의 도는 우리에게 여전히 전해 내려온다. 지난해 우리는 스승 지훈(芝薰)을 기리는 학술모임을 가지면서 그의 선비다움과 지사적인 면모, 그리고 시 세계를 점검했었다. 올해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우리는 국사(菊史)의 삶과 학문 세계를 기리는 학술모임을 갖고 스승의 도를 다시 새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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