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녹아든 부캐 신드롬

플랫폼 다양화와 인식 변화가 원인

코로나로‘생계형’ 부캐도 늘어

 

  방송계에 ‘부캐’ 열풍이 불고 있다. MBC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놀면 뭐하니’는 부캐 콘텐츠를 이용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MC 유재석이 트로트 신인가수 유산슬, 하프연주자 유르페우스, 라면 요리사 라섹 등으로 변신하며 저마다의 퀘스트를 수행했다. 이른바 유(YOO)니버스의 흥행 이후, 유명 가수들의 부캐로 결성된 그룹 ‘싹쓰리’, ‘환불원정대’가 가요계에서 좋은 성적을 냈고, 개그우먼 김신영은 ‘둘째이모 김다비’라는 이름의 77세 트로트 가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강민희(대구한의대 기초교양대학) 교수는 방송에서 비춰지는 부캐를 “실패의 자유가 보장될 뿐 아니라 직장인의 애환과 꿈이 담겨있는 존재”라고 설명했다.

  ‘부캐’는 본래 온라인 게임에서 쓰이던 용어로, 메인으로 사용하는 계정 외에 특정한 목적으로 추가로 만든 캐릭터나 계정을 이르는 개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본업 외에 자신을 드러내는 또 다른 정체성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윤영훈(성결대 신학부) 교수는 “예명을 쓰던 가수가 배우로 활동할 땐 본명을 사용하거나 평범한 사람이 인터넷상에서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등 과거에도 일종의 ‘캐릭터 전환’은 있었지만, 부캐라는 용어가 쓰이면서 현상이 더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누구나 부캐 하나쯤 품고 산다

  TV 속 부캐 신드롬의 배경은 시청자의 공감이다. 현대인에게 ‘낮에는 회사원, 밤에는 요가 강사’라는 자기소개는 낯설지 않다. 자아실현을 우선시하고 좋아하는 것을 쫓는 추세는 ‘또 다른 나’를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와 아르바이트 중개 플랫폼 ‘알바몬’이 성인남녀 179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설문 참여자 중 16.3%가 ‘현재 부캐를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56.3%는 ‘현재는 없지만 향후 가지고 싶다’고 답했다.

  자신만의 부캐를 소개하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도 등장했다.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드 프로젝트(Side Project)’는 마카롱 굽는 의사, 마케터이자 PD 등 다양한 ‘다능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 운영자 정혜윤(여·35) 씨는 참신한 방식으로 여러 영역의 일을 즐기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2주에 한 번씩 구독자에게 뉴스레터를 보낸다. 정혜윤 씨는 “사이드 프로젝트 커뮤니티가 다른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줬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뿌듯하다”며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건단점이 아니라 축복임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낮아진 진입장벽·바뀐 근무환경이 발판

  부업을 가지거나 여가시간을 즐기는 이들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부캐가 문화 현상으로 발전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인터넷 플랫폼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부캐 생성의 진입장벽이 낮아졌다. 강민희 교수는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나눌 수 있는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의 출현이 부캐 열풍을 탄탄하게 했다”고 말했다. 유튜브의 부상이 대표적이다. 관련 학과를 전공하거나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필요한 동영상을 찾아보며 간편하게 전문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본인의 전문 분야를 살려 1인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직장에서의 승진보다 개인의 행복이 더 중요해진 현대인의 가치관 변화도 한몫했다. 이항심(건국대 교육대학원상담학과) 교수는 “획일적이었던 사회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다원화되면서 본인의 색깔을 찾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커졌다”며 “자기다움으로의 회귀가 회사 밖 부캐 형성의 근간이 됐다”고 말했다. 일터로부터 주어진 사다리로 무작정 올라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 나만의 모듈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직업 환경의 변화 역시 자연스레 부캐를 찾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는 등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 존중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가운데, 평생직장의 개념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이항심 교수는 “기술 발달로 인한 일자리 대체 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N잡러’ 유행의 가장 큰 이유”라고 전했다. 직장을 잃더라도 대체할 부캐가 있으면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취미로 시작해 소중한 수입원으로

  재능이나 노하우, 결과물을 쉽게 사고 팔 수 있는 플랫폼의 다양화는 부캐의 범위를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까지 넓혔다. 대표적으로 글쓰기, 포토샵 등 크고 작은 재능을 상품화해 거래하는 프리랜서마켓 ‘크몽’, 전문가에게서 각종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온라인 수강 플랫폼 ‘클래스101’, 별도의 비용 없이 자유롭게 상품을 등록할 수 있는 오픈형 쇼핑몰 서비스‘스마트 스토어’ 등이 있다. 판매자는 취미와 재능을 서비스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어 좋고, 구매자는 외주 작업을 맡겨 다른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어 이득이다.

  평범한 회사원인 한승현(여·34) 씨는 온라인 마켓에 일러스트 굿즈를 판매하고, 재능 거래 플랫폼을 통해 외주로 일러스트를 그리고 있다. 부캐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월 1500만 원으로, 본캐의 수입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가벼운 취미를 비중 있는 사이드잡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한승현 씨는 “나의 재능과 잘 맞는 플랫폼들을 활용하여 좋아하는 일을 더 쉽게 확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코로나가 가속화한 부캐 신드롬

  코로나19 팬데믹은 부캐 문화의 증폭제가 됐다. 뜻하지 않은 재택근무는 이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은 늘렸다. 한승현씨는 “재택근무로 인해 출퇴근 시간을 3~4시간 넘게 아낄 수 있어서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며 “클래스 101의 아이패드 드로잉 강좌이용자도 펜데믹 이후 급격히 늘어났다”고 전했다. 실제로 작년 한 해 동안 재능거래 플랫폼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는데, 프리랜서 플랫폼 ‘숨고’는 2020년 서비스 주문 건수가 전년 대비 189% 급증했고, ‘크몽’의 전문가 등록 건수 역시 두 배 이상 늘었다. 코로나로 수익이 줄어들며 소위 생계형 부캐 소유자가 늘어나기도 했다. 배달 플랫폼 ‘배달의민족’이 운영하는 ‘배민커넥트’는 배달을 직업으로 하는 라이더와 달리 원하는 날짜와 시간이 선택 가능한 서비스로, 지난해 12월 기준 누적 등록 인원 5만 명을 돌파했다. 2019년 12월 1만 명을 달성한 이후 1년 만에 5배 이상 급성장한 것이다. 파트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GS도보 배달 서비스 ‘우친’ 역시 지난해 8월 중순 1000명대에서 12월에 4만5000명으로 늘었다. 이승우(대구한의대 기초교양대학) 교수는 “코로나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재능거래 플랫폼 시장이 확산되고 투잡에 나서는 직장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며 “부캐가 단순히 ‘놀이’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 키워드임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미디어와 현실 속 부캐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마주하는 부캐 콘텐츠는 시청자들의 피로감을 불러일으켜 문화 콘텐츠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다. 반면 일반인들의 부캐 현상은 더 깊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윤영훈 교수는 “부캐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새로운 플랫폼이 계속해서 창조되고 온라인 세계가 더욱 활발해진 상황을 고려할 때 부캐는 더욱 보편적인 일상으로 자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성수민 기자 skycastle@

사진제공 | MBC 공식 홈페이지, 미디어랩 시소, 세임사이드 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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