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영화로

문화·세대 초월한 보편성

아시안 콘텐츠 열풍 대열 합류해

  제7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재미교포 2세 아이작 정(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어 영화가 외국어영화상을 차지한 건 작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 <미나리>는 세계 각종 영화 관련 시상식에서 85관왕을 기록했으며, 배우 윤여정은 이 영화로만 총 30여 개의 연기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배우 한예리의 골드리스트 여우주연상 수상과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2관왕까지, 연이은 희소식에 영화계가 떠들썩하다.

  각종 시상식에서 연일 수상 소식을 전하는 <미나리>와 함께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올해 개봉작이 있다. 지난 2월 4일 개봉한 중국계 미국인 룰루 왕 감독의 <페어웰>이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두 영화 모두 할리우드에서 주목하고 있는 아시안 콘텐츠 영화로,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연을 맡은 아콰피나는 한국계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영화는 전 세계 34관왕 16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2019년, 2020년 1월 선댄스영화제에서 각각 공개된 <페어웰>과 <미나리>는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 아시안 콘텐츠 열풍의 한가운데 있다.

 

자전적 경험이 주는 감동

  영화 <미나리>는 80년대 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미국 남부 시골 마을로 떠나온 한국 이민자 가정을 주인공으로 한다. 농장 경영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제이콥(스티브 연)은 아내 모니카(한예리 분)의 반대를 무릅쓰고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로 이사한다.

  한국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한 그는 경험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우물을 파고, 밭을 갈고, 작물을 심는다. 계획과 달리 농사도 판매도 쉽지 않을뿐더러, 빚만 늘어가는 상황이다. 한편 두 아이 앤(노엘 조)과 데이빗(앨런 김)을 돌봐줄 이가 필요했던 부부는 고민 끝에 한국에서 모니카의 엄마인 순자(윤여정)를 부른다.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데이빗은 할머니의 한국식 보약과 거침없는 ‘지랄’, ‘염병’이 반갑지 않다.

  정이삭 감독은 그가 자신의 딸 나이였을적 겪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미나리>의 각본을 썼다. 순자를 통해 본인의 할머니를 추억했으며, 제이콥에는 아버지와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투영했다. 영화에서처럼, 농장을 시작한 아버지와 새 직장을 구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그를 돌봐줄 할머니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다. 그때 할머니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이 다른 채소보다 더 잘 자라는 모습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았다. 낯선 땅에 뿌리내린 채 치열하게 살아가는 <미나리> 속 가족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그의 경험은 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보편적인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에 자리한다.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미국 한인 가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미국 한인 가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

 

  <페어웰> 역시 감독의 자전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했다. 중국 이민자 부모와 함께 뉴욕에 살고 있는 빌리(아콰피나)는 중국에 있는 할머니(자오 슈젠)가 폐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하지만 이미 가족들은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 숨기기로 결정한 상황이다. 영화는 마지막이 될지 모를 할머니와의 만남을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이 빌리의 사촌 하오하오의 ‘가짜 결혼식’이라는 엉터리 거짓말을 꾸미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주인공 빌리는 룰루 왕 감독의 젊은 시절을 대변한다. 룰루 왕 감독 가족의 거짓말로 인해 벌어진 실화가 영화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것은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라는 문구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8년 전 폐암 선고를 받은 그의 할머니는 룰루 왕 감독이 영화를 찍을 때조차 본인이 폐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비밀은 2019년 중국에서 영화가 개봉하면서야 들통났다. 다행히 지금까지 건강히 살아 계시다는 후문이다.

아픈 할머니를 향한 선의의 거짓말 속 가족의 사랑을 담은 영화 '페어웰'
아픈 할머니를 향한 선의의 거짓말 속 가족의 사랑을 담은 영화 '페어웰'

 

  영화 속에 투영된 감독의 자전적 경험은 인물의 삶을 가까이서 살피는 동시에, 그를 더욱 응원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정재형(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자전적인 작품은 영화나 예술이 삶과 유리되지 않는다는 진지한 의식을 심어준다”며 “영화는 단순한 오락의 대상이 아닌, 삶의 진실을 깊이 사유하게 하는 매체”라고 전했다. 유지나(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는 영화에 반영된 개인적 체험의 의의를 이렇게 표현한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상처를 토로한다는 것은 자기 치유적인 행위 같아요. 예술은 고통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요.” 살아오며 남긴 치열한 고민의 흔적, 어린 시절의 추억 혹은 악몽을 가지고 두 감독은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 어느새 그 기억의 조각으로 완성된 영화는 수많은 이웃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경계에 선 이들에게 전하는 위로

  “중국이 더 좋아요, 미국이 더 좋아요?” 중국의 한 호텔 직원의 말에 <페어웰> 속 빌리의 대꾸는 우문현답이다. “그냥 달라요.” 또 다른 누군가 묻는다. “중국 사람이에요, 미국 사람이에요?” 빌리는 혼란스럽다. 여섯 살 때부터 미국살이를 시작한 빌리에게 중국은 고향보단 외국같다.

  “할머니한테서는 한국 냄새가 나.” 한국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미나리>의 데이빗은 입을 삐죽댄다. “할머니는 할머니 같지 않아요.” 할머니 같은 게 뭐냐고 순자는 되묻는다. ‘쿠키도 만들고 욕도 안 하고 남자 팬티도 안 입는’ 할머니의 모습이 익숙한 데이빗에게 순자는 낯설기만 한 존재다. 데이빗과 순자가 투닥거리며 집에 머무는 동안, 이민 1세대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는 한국과 미국 중 어디에도 완벽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좁고 어두운 병아리 감별 공장으로 출근한다.

  두 영화는 모두 ‘경계’를 이야기한다. 중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속에서 빌리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 낯선 미국 땅에 정착하기 위한 한국 이민 가정의 고군분투, 그리고 ‘미국 보이’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느꼈던 거부감.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문화와 세대의 경계선 사이에서 휘청이며 자신을 정의해 줄 테두리를 찾아 헤맨다.

  이민자가 아닌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수도 없는 경계와 고립을 마주한다. “세대와 국적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한 번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기분을 느껴 봤습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꿈을 이루지 못해서, 아니면 이사 간 동네가 너무 낯설어서 그랬을 수도 있어요.” 남선우 씨네21 기자는 <페어웰>과 <미나리> 모두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이들이 끌어안은 한 줄기 빛에 대한 영화라며, 그 빛은 결국 가족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고 말한다. “가족은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사회이자 나와 가장 닮은 사람들의 집합이잖아요. 고향을 떠나 다른 피부색의 사람들과 살게 된 이민자들에겐 더더욱 그럴 테고요.”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가족으로 인해 크고 작은 압력을 받지만, 동시에 그들의 존재가 오랫동안 자신을 사랑으로 붙들어줬음을 고백한다. 갈수록 쇠약해지는 <미나리> 속 순자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빌리의 할머니(자오 슈젠)의 모습은 그 사랑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나타낸다. 두 영화는 과거 아름다운 한 시절을 추억하며 현재를 꿋꿋이 살아가는 세상 모든 보통의 사람들을 울린다.

  늘상 못마땅한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던 데이빗은 어느새 순자와 사이좋게 화투를 친다. 빌리는 뉴욕 시내 한가운데서 할머니에게 배운 체조의 기합을 내뿜으며 중국을 추억한다.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많은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는 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본 '경계'에 대한 기억과 공감 때문이다.

아픈 할머니를 향한 선의의 거짓말 속 가족의 사랑을 담은 영화 '페어웰'
아픈 할머니를 향한 선의의 거짓말 속 가족의 사랑을 담은 영화 '페어웰'

 

비슷한 듯 다른 두 영화의 평행이론

  <미나리>와 <페어웰>은 많은 공통분모를 가진다. 아시아계 감독이 아시아계 배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둘 모두 이용옥 미술감독이 프로덕션 디자이너로 참여했으며, 독립영화를 주로 제작하는 미국영화사 A24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 또한 눈에 띈다. A24는 <페어웰>을 배급했으며 <미나리>의 경우 제작과 투자까지 맡았다.

  가장 두드러지는 공통점은 ‘할머니의 재발견’이다. 최근까지는 실버 영화에서 남자, 즉 할아버지가 극의 중심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유지나 교수는 “나이든 여성이 영화 안에서 활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여성 서사가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두 작품 모두 ‘할머니 캐릭터’가 가지는 존재감이 엄청나다. <페어웰>에서는 사건이 발단하고 전개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할머니가 제공하며, 순자로 인해 <미나리>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뀐다.

  <미나리> 속 순자는 윤여정 배우와 정이삭 감독이 함께 만든 캐릭터다. 뻔하지 않은 순자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할머니? 나 그런 거 하기 싫어’라는 말을 툭툭 던지는 윤 배우와도 닮았다. “미국 애들은 미나리가 좋은 건지 모르지? 미나리는 아무 데서나 잘 자라.” 작은 몸으로 꿋꿋이 미나리를 심는 순자의 모습도 미나리처럼 억세지만 푸르다. 잘 살고 있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눈물 흘리는 모니카 앞에서 순자는 “미국 와서 이렇게밖에 못 사냐, 한국 돌아와라!”하는 대신 “바퀴 달린 집? 재밌다 야!”라는 말로 위로를 건네는 멋진 할머니다.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미국 한인 가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미국 한인 가정을 그린 영화 '미나리'

 

  두 영화의 차이점도 분명 존재한다. <미나리>가 한 가족 전체에 대한 영화라면, < 페어웰>은 좀 더 빌리 개인의 관점에 집중했다. 시간적 배경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조현나 씨네21 기자는 “<페어웰>이 이민 2세대인 빌리가 겪는 정체성 혼란에 초점을 맞췄다면, <미나리>는 데이빗, 앤과 더불어 이민 1세대인 모니카, 제이콥의 삶도 비중 있게 다룬다”고 설명한다. <미나리> 정이삭 감독은 1978년생, <페어웰> 룰루 왕 감독은 1983년생으로 다섯 살 정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남선우 기자는 “비슷한 세대인 둘 중 하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의 현재 혹은 현재보다 조금 어렸던 청년 시절을 다룬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나 기자는 두 개의 다른 문화와 세대가 조우하는 방식에서 또 다른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나고 자란 데이빗의 세계에 순자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세대·문화적 충돌이 생겼다면, <페어웰>은 빌리가 할머니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아시안 콘텐츠의 연이은 흥행

  아시아 이민자들을 다룬 ‘웰메이드’ 작품은 <미나리>와 <페어웰>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에는 중국계 이민자들의 미국 생활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다룬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과 웨인 왕 감독의 <조이 럭 클럽>이 유럽과 북미에서 인기를 모았다.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시아 문화를 다룬 작품들이 또다시 할리우드에서 사랑받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제니 한의 소설 원작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 이번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2관왕을 차지한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 등 미국 이민 2세대 아시아인 제작자의 작품들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아시안 아메리칸 시네마’가 주목받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한계를 딛고 아시안 콘텐츠는 도약을 이어가고 있다. 조현나 기자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반쪽의 이야기> 등 아시아계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하면서, 그 뒤를 이을 새로운 콘텐츠들이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고 전했다. <서치>의 아니시 차칸티 감독, <그것(It)>의 정정훈 촬영감독,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김보연 작가 등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활약도 증가하는 추세다. 정재형 교수는 이러한 추세를 “백인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다문화성에 한 발짝 다가가고 아시아계 제작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설명하면서도 “단순한 볼거리 제공이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왜곡된 시선을 담아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좋은 영화는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고 문화와 세대를 아우른다. 문화의 차이를 수용하고 언어의 다름을 이해하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미나리>와 <페어웰>은 이미 1인치의 장벽을 거뜬히 뛰어넘고 전 세계를 누비는 중이다.

 

글|이다연 기자 idayeoni@

사진제공|영화 <미나리>, <페어웰> 공식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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