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었다. 노회찬 의원이 ‘6411번 버스의 노동자들을 언급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새벽부터 한국의 경제중심지를 쓸고 닦고 빛내는 청소노동자들이지만, 그 누가 그들의 존재를 그 누가 알고 있었겠느냐며, 투명인간들이야말로 정치가 재조명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이 인상 깊은 이유는,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정치의 역할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그는 약자들, 소수자들을 투명인간이라고 지칭하면서도, 과연 그들에게 정치가 닿을 수 있는 곳에, 보이는 곳에 있었느냐며, 그러지 못한 정치야말로 투명정치라고 말한다. 약자와 소수자, 아울러 시민 모두에게 닿을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정치를 자성하며, ‘정치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정치는 시민들의 곁에 있지 않다. 최근 변희수 하사, 김기홍 녹색당 활동가 등 성 소수자의 죽음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다. 그뿐인가, 서울시장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성 소수자를 보지 않을 권리를 언급하며, ‘선명성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정치는 투명인간을 외면하였고, 이는 결국 무수한 투명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정치가 게으르고 무책임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정치더러 제 역할을 다하라고 요구하고,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고인이 된 변희수, 김기홍의 삶 역시 결코 투명인간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였고, 자신들은 투명인간만이 아니라고, 정치가 자신들의 존재를 충분히 대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를 투명한 정치에 맞선, ‘투명인간의 정치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게으르고 무책임한 정치에 맞서, “일 좀 해라!”라고 외칠 수 있는 정치 말이다. 욕심을 좀 부린다면, 나는 투명인간의 정치가 결국 시민의 정치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싸강 듣는 대학생, 실직한 직장인, 폐업한 자영업자, ‘이 시국에 소외되고 대변 받지 못하는 시민 누구나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희수의 삶은 단지 추모의 대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슬프고 절망적인 이때, 평범하고 특별했던 시민’, 변희수, 김기홍의 죽음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니기를 소망해본다.

박세휘(사범대 교육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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