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MBTI는 ENTJ다. 가끔 계획 없이 행동할 때가 있다. “너는 J(계획형)인데 왜 그래?”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질문에는 문제가 없다. 신빙성이 있든 없든 나를 이해하는 단서로 MBTI를 사용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놀라웠던 건 내가 “나는 J인데 왜 그랬지?”라고 반문했던 것이다. 나를 바라볼 때조차도 낯선 남을 보듯, 나 자체가 아닌 단서를 먼저 보게 된다.

  MBTI는 오래된 주제지만 아직도 대화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한 소재다. 서로의 MBTI를 알아가고, 행동에 대한 진단도 내린다. 아직도 MBTI의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는 ‘정의내림’의 편리함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어떤 낯선 존재라도 거기에 이름표를 붙이면 두려움이 옅어진다. 그러다가 점점 이름표 뒤에 있는 실체에 무뎌진다. 이름표들은 넘쳐난다. MZ, MBTI, 이대남, 이대녀… 두려움을 거둬내기 위해 임시로 붙여놓은 것들이다. 무엇으로라도 묶어서 정의 내렸을 뿐인데, 그것들을 너무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해되지 않던 현상들도 이름을 붙인 순간 그걸로 설명하면 끝이다. 그 이상의 고민은 사라진다.

  청년 세대를 MZ라 명명하는 순간, 모든 현상은 MZ로 환원된다. “너는 왜 그러니?”라는 질문보단 “MZ니까 그래”라는 단정이 편하다. 이름표는 이해에도 편리하지만 이용하기에도 편리하다.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름표를 투사하고 변명을 한다.

  타인에게 편리한 이름표로 계속 그렇게만 불리다 보면, 나를 조금 더 쉽게 알아보기 위해 잠깐 붙였던 ‘정의’가 진짜를 집어삼키게 되기도 한다. 나를 더 납작하고 편리하게 보기 위해 붙여둔 이름표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도 되겠는가.

  현대시론이라는 수업에서 시인들의 사조에 대해 배웠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시인들은 자신이 리얼리즘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그냥 좋은 시인이다”였다. 실체를 모르니까 이름표가 필요했던 거다. 시인들은 자기 시를 잘 알고, 자기를 잘 안다. 그래서 ‘리얼리즘’ 따위의 임시 명찰은 필요 없다.

  남과 달리, 나는 나를 안다. 그러니 이름표는 필요 없다. 그래서 나도 ‘그냥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나에게 관찰자가 아닌 사람은 나 하나뿐이니까. 관찰자가 내린 정의가 아닌 그냥 나 자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를 설명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인 MBTI, MZ로 굳이 스스로를 정의내리지는 않겠다. 종이로 만든 라벨이 떨어져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ENTJ가 즉흥적이라도 나는 나다.

 

이정우 사회부장 van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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