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양귀자

  ‘모순은 삶과 인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인 듯하다. 인간의 모순으로 인한 마음의 해체가 오히려 안진진에게 생에 대한 의지를 선물해 주었던 것은 아닐까. ‘모순을 받아들이는 인간만이 삶을 견딜 수 있다 말하던 누군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그때 넌 나에게 안정을 말하며 내가 잘 살기를 바란다 말했지. 나는 몰랐던 것이다. ‘지리멸렬한 안정무덤 속의 편안함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음을. 너의 불안 이면에는 삶의 부피를 늘려주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며, 나의 안정 이면에는 다시금 불안을 찾고자 하는 유혹이 존재한다. 너는 우리의 모순을 깨달았을까.

  선택. 각자의 선택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네가 나로 또 내가 너로 존재할 수 있음을.

 

  삶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씹을 줄만 알았지 즐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에피소드란 맹랑한 것이 아니라 명랑한 것임에도.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에도 순수에도, 혼란고민에도. 우리는 인생을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인생을 탐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난 알면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삶이 이토록 지리멸렬해진 것을 모두 다 어머니에게 떠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을 분석한다고 때로는 문제가 있는 가정에, 혹은 사회에, 아니면 제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분석들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방종을 정당화하려는 젊은 애들을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교활함을 참을 수 없어 한다. 특히 열대여섯 되는 어린애들이 텅 빈 머리로 앵무새처럼 그런 핑계를 대고 있으면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야 한다.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인간들.

 

  모든 생의 시작인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타버린다. 난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마음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들 사이의 구정물을 만들어내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래야 각자의 고유한 색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서로 가까이할수록 상처 입는 고슴도치가 우리라는 자아의 구성 방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박시언(정경대 경제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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