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가장 좋아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바로 인간 그 자체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그 자신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연원은 동서양 모두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랫동안 사람의 얼굴을 그린다는 동일한 목적과 쓰임새를 가지고 제작된 그림이지만, 그것이 그려진 시대, 문화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바꿔 말하면, 초상화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조 초상화에 대한 연구, 1996> 김성옥씨의 석사논문에 따르면, 초상화에는 그것이 그려진 문화권의 예술관이 나타난다. 동양과 서양의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실제와 똑같이 그린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양의 목표가 실제와 똑같은 육체를 화면에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동양의 목표는 모델의 정신과 인격까지 표현하려는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서양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해부학이나 원근법, 명암법, 단축법 등 과학적인 원리를 총동원해서 초상화를 그렸다. 반면 동양의 초상화는 얼굴은 평면적이고 자세는 딱딱하지만 그림 전체에서 풍기는 인물의 기품을 숭상했다.

인물의 자세나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조선시대 초상화는 얼굴 묘사에 치중해 손을 비롯한 신체 다른 부위들은 옷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서양 작품에 나타나는 손의 표현은 해부학적으로 정확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의 손에는 정말 창조의 기운이 서려있는 듯한 느낌조차 받을 수 있다. 서양의 예술은 인물 자체를 하나의 독립된 대상으로 여기며, 그 인물이 작품의 주제가 되고, 중심이 된다. 그러나 동양의 예술에서 인간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초상화는 또한 인물의 내면세계를 표출한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이건 탁월한 초상화는 조형적인 장점을 넘어 어떤 정신적 의미를 전달한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이다. 사조라는 것은 작가가 바라보고 관찰한 대상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을 뜻하고, 전신이란 그 대상의 내면에 들어있는 정신과 성격을 그려낸다는 말이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자. 윤두서의 자화상은 수염 한 올 한올이 그대로 묘사돼 있는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윤두서의 그림은 화면 가득히 안면을 표출해 생명력 넘치고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사대부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해 내기도 한다. 특히 눈을 강조했는데, 이는 눈이 성스러운 것의 상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조실록>에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초상화가 특정인물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극도로 사실적인 표현에서 알아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윤두서의 작품에서는 눈 주위에 불그스레한 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윤두서가 안경을 착용했던 자국이다. 그 당시 안경은 끈을 이용해 머리 뒤로 묶는 형태였기 때문에 안경을 벗자 자국이 남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문신인 이채 초상에는 검버섯이나 부종까지도 그려져 있다. 이는 현대의 피부과 의사들이 그림만 보고도 병력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또 사대부들의 전신상에서 그 당시 복식과 흉배 무늬에 관한 귀중한 사료를 얻어낼 수도 있다. 중국의 초상화에는 금색 안료를 사용해서 중국 복식의 화려함과 배경에 놓인 가구까지도 정밀하게 묘사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양식 고찰, 1993>박창렬씨의 석사논문은 시대에 따른 초상화 기법과 형태의 변천사가 곧 역사적 사실임을 일러준다. 동양에서, 특히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조선시대에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크게 융성한 바 있다. 이는 조선 초기에  어진(御眞), 공신도상(功臣圖上)의 제작이 많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의 초상화는 화폭 내의 인물들의 입체감이 늘어나고 원근법이 도입된 것으로 보아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화법이 반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초상화는 문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말을 주로 타던 중국의 만주족의 초상에 그려진 복식에는 거친 바람에서 손등을 보호하기 위해 손등을 덮는 소매가 덧붙여져 있었다. 조선시대의 명재상 황희 정승의 초상에는 흉배가 없는데, 이는 화려한 흉배가 사치를 조장한다는 정승의 생각이 반영됐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근대에 들어 사진 기술이 도입되면서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리는 ‘사진 같은 그림’도 초상화의 한 갈래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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