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만에 첫 본선 진출

럭비 불모지에 싹 틔워

결과 상관없이 역사 새로 쓰다

럭비 국가대표팀은 한국에 럭비가 도입된지 98년만에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그토록 바라던 1승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은 "한국 럭비는 지금부터"라고 입을 모았다.1. 장성민(체육교육과 11학번) 선수 2. 김남욱(체육교육과 08학번) 선수 3. 이진규(체육교육과 13학번) 선수 4. 정연식(체육교육과 12학번) 선수
럭비 국가대표팀은 한국에 럭비가 도입된지 98년만에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그토록 바라던 1승에는 실패했지만 이들은 "한국 럭비는 지금부터"라고 입을 모았다.1. 장성민(체육교육과 11학번) 선수 2. 김남욱(체육교육과 08학번) 선수 3. 이진규(체육교육과 13학번) 선수 4. 정연식(체육교육과 12학번) 선수

 

  실업팀 3개, 대학팀 4개, 2018년 기준 등록선수 987명. 럭비 ‘불모지’ 한국의 현실이다. 그런 한국이 일을 냈다. 한국에 럭비가 도입된 지 98년 만에 올림픽 본선에 진출한 것. “역사적인 사건의 일원이 되어 영광입니다.” 선수들은 한국 럭비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 다녀온 소감을 전했다. 이진규 선수는 “럭비 강국의 선수들과 함께 경기하는 게 의미 있었다”며 “강한 선수들에게 질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기려 노력하는 모습이 스스로 자랑스러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남욱 선수는 평생 안줏거리를 얻었다며 웃어 보였다. 올림픽이라는 꿈같은 순간도 잠시, 그들은 국내 리그로 복귀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대표팀으로 활약한 김남욱(체육교육과 08학번), 장성민(체육교육과 11학번), 정연식(체육교육과 12학번), 이진규(체육교육과 13학번) 교우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년, 럭비공 집어 들다

  이들이 럭비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가지각색이다. 중학생 때 럭비부에 들면 두발 자유를 준다는 감독의 말에 시작하기도 하고, 힘겨루기를 좋아해서 시작하기도 했다. 저마다 럭비 인생을 달리 시작했지만, 네 사람이 느낀 럭비의 매력은 비슷했다. 여타 구기 종목에 견줬을 때 럭비는 과격한 몸싸움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득점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의 스피드까지 더해져 강단있고 다부진 스포츠라고 모두 입을 모았다.

  청소년기에 럭비에 매료된 네 사람은 본교 입학 후 각자의 성장 궤적을 밟으며 꿈을 펼쳐갔다. 김남욱 선수의 대학 시절은 럭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시키는 것만 열심히 하던 중·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대학에서부터는 플레이를 직접 생각해야 했다”며 “이때 상황 판단능력이 크게 성장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이진규 선수는 대학생 선수 시절을 가장 힘든 시기로 꼽았다. 대학 입학 후 군기 잡힌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후배 간의 규율이 심해 경기가 끝나면 집합해 혼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국가대표’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22살에 리우올림픽 선수로 발탁되며 자신감이 붙었죠.”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태극마크를 달았던 경험은 럭비를 포기하지 않고 버티게 하는 힘이 됐다.

 

올림픽 본선을 ‘트라이’하다

  도쿄 올림픽까지는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훈련했고, 시련도 있었다. 정연식 선수는 상대국 대표팀의 영상을 너무 많이 봐서 꿈에 나올 정도였다. 정 선수는 체중 관리에도 힘썼다. 7인제인 올림픽은 힘보다 스피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15 인제를 준비하며 ‘벌크업’을 많이 해놨더니 몸이 무거워져 스피드가 안 났어요.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는 5~6kg 감량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결성된 럭비  표팀은 ‘원 팀(One team)’을 만들기에 유리했다. 보통 국가대표팀은 각기 다른 소속의 선수들로 구성돼 하나로 뭉치는 게 어렵지만, 럭비는 달랐다. 선수도 팀도 적기 때문이다. 이진규 선수는 “다들 어릴 때부터 함께해온 형들이었다”며 “협동심을 기르기에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정연식 선수는 “모든 일정마다 함께 움직이려고 했다”며 팀 내에서 정한 규율을 설명했다. 지각에는 1분당 1000원, 야식에는 5만 원의 벌금을 걸어 올림픽을 향한 열의를 함께 다졌다. 여기에 주장인 박완용(체육교육과 06학번) 선수의 리더십까지 더해져 선수들은 훈련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아시아 지역 예선은 극적인 순간의 연속이었다. 준결승과 결승은 *서든 데스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두 경기 모두 극적인 역전을 이뤄 더 값진 승리였다. 김남욱 선수는 결승 홍콩전 승리 상황을 생생하게 회상했다. “난리가 났었죠. 서든 데스에서 트라이 (득점)를 찍는데 시합 끝나기도 전에 벤치에 있던 선수들이 다 달려 나와서 이거 잘못되는 거 아닌가 생각도 했고요. 지고 있던 걸 역전하고, 서든 데스에서 승리했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뻤습니다.”

 

언더독, 세계무대로 돌격!

  두 번의 극적인 승리 이후, 대표팀은 “올림픽 가서도 일 한 번 내보자” 고 다짐했다. 첫 상대는 세계 2위 ‘올 블랙스’(All Blacks, 상·하의와 양말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하는 뉴질랜드 대표팀 별명)였다. 대표팀은 전반을 5-14로 마치며 비교적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5분께 나온 정연식 선수의 ‘트라이’는 한국 럭비 역사상 올림픽 첫 득점이었다. 정 선수는 “득점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정신 차려 보니 안드레 진 선수와 포옹하고 있었죠. 정말 짜릿했어요.”라고 말했다. 대표팀은 후반에 내리 36점을 실점하며 최종 점수 5-50으로 패했다. 큰 점수 차였지만, 동경의 대상이었던 뉴질랜드를 상대로 득점한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충분했다.

  세계무대의 벽은 견고했다. 호주, 아르헨티나, 아일랜드를 만나 5점을 득점하는 동안 129점을 실점했다. 김남욱 선수는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에 맞지 않은 경기 결과가 나와서 분하고 아쉬웠다”며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낙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바로 다음 한일전이 예정돼 있었다. 올림픽 진출이 확정된 순간부터 일본만은 이기자고 다짐했던 대표팀이었다. 선수들의 눈빛은 모두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김남욱 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공기 자체가 달랐죠. 전쟁을 치르기 직전의 순간 같았어요.” 선취점은 한국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점을 허용했고, 후반 막판 2번의 **신빈은 치명적이었다. 대표팀은 체력 문제를 노출하며 19-31로 아쉽게 패했다. “한일전을 하며 조금만 더 하면 이길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체력적인 부담이 패배로 이어졌어요.”

  간절히 바라던 1승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응원해준 국민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김남욱 선수는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은 무기력한 패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패배를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설욕을 다짐하는 ‘언더독’의 모습이었다. “세계선수들과 경기하며 벽을 느끼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희가 뒤떨어진다는 생각보다는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 체력운동 더 했으면 됐겠다. 연습게임 경험을 더 쌓았으면 어느 정도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어요. 상대 팀과 점수 차가 많이 나는 상황에서도 가능성을 확인했고,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굿 럭, K-럭비

  “럭비는 비인기 종목을 넘어 ‘비인지’ 종목이었죠” 이진규 선수는 도쿄 올림픽 이전까지 한국 럭비의 입지가 얼마나 약했는지 강조했다. 네 선수는 저마다의 꿈을 이야기하면서도 한국 럭비의 발전을 빼놓지 않았다. 선수들은 현재 세 개뿐인 국내 실업팀과 천 명 남짓인 선수들의 수를 늘려서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김남욱 선수는 이번 대표팀에 30대 노장 선수들이 많았다는 점을 꼽으며 “대학교에서 좋은 선수들이 계속 나와서 선수층이 젊어지고 좋은 코치들에게 배우면 지금보다 훨씬 가능성 있는 한국럭비가 될 것 같다”고 전망했다.

  럭비 인생에서의 꿈을 묻자 정연식 선수는 개인적인 야망보다도 럭비의 대중화를 앞세워 말했다. 그는 “국내리그가 활성화돼서 럭비 팬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며 “나아가 럭비가 축구나 야구처럼 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매김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럭비를 향한 선수들의 짙은 애정만큼, 네 사람 모두 자신들이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 순간에도 훈련중인 후배에게

김남욱 | “아시아가 럭비에서 약한 축에 있지만, 한국 선수들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정신적·신체적으로 강점이 있어서 지금 어린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잘 배워 놓는다면 분명 나중에 그 친구들이 대표팀이 되고 세계적인 선수랑 겨뤄도 좋은 성과를 얻을 거라 생각해요.”

장성민 | “올림픽에서 1승을 안겨 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세대가 첫 장을 열었으니까 다음 올림픽의 1승, 2승, 3승의 주인공은 후배들입니다!”

정연식 | “얘들아, 럭비가 정말 매력 있고 재미있는 운동이라는 걸 내가 몸소 증명해 보일 테니까, 지금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태극마크도 달고, 나보다도 더 많고 좋은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 응원할게!”

이진규 | “한국에서 노력하는 후배 선수들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럭비가 많이 바뀌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실업팀들뿐 아니라 대학교에서도 변화가 있을 테니 일찍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장 목표를 바라보면서 계속 정진하기를 바라요.”

 

*서든 데스(sudden death) : 정규시간 안에 승부가 나지 않은 경우, 연장전에서 먼저 득점하는 팀이 승리하는 경기 방식

**신빈(sin-bin) : 과한 몸싸움과 태클로 인해 받는 파울. 신빈을 받으면 경기장에서 10분간 퇴장

 

글 | 권은혜·김시현·김영은·류요셉 기자 press@

사진제공 | 대한럭비협회·김남욱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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