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부조리를 함께 목격하고 나서 생기는 감정이 있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게 될까. 첫 번째 분기점은 잊어버리기 아니면 기억하기를 택하는 것이다. 감정적 공감에는 큰 에너지가 들기에 결국 피로가 오는 만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빨리 잊거나 아예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무래도 편한 길이다. 하지만 좀 더 힘든 길인 기억하기를 택했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과제가 주어진다. 시원한 사이다의 길은, 강렬한 감정의 기억에 집중하며 큰 적을 무찌르고자 달려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갑갑한 고구마의 길은 좀 다르다. 문제의 부조리한 사건이 남긴 다양한 종류의 아픔을 모아내고 또 직시하여, 사건을 추상적인 재앙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뀌어 버린 사람들의 삶으로 인식하게끔 유도한다. 내가 느낀 감정 하나를 증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의 상황에서 겪는 슬픔과 분노들을 통해 사건의 사회적 무게를 던져준다. 그렇게 하여 비로소 사실관계가 거의 밝혀졌고 법적 처벌이 진행되었다 한들, 사건의 의미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이야기하게 된다.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김홍모 / 창비)라는 작품을 이야기하기 위해 서론이 길었다. 세월호 침몰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에게는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바다에 수장당하는 참극을 생중계로 목격한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어떨까. 해상 재난의 긴박한 상황에서, 어른스러운 어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학생들을 수십 명 구해냈다. 그런 강인한 의인의 사연이라면 그나마 비극 속에서도 하나의 희망이 되어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김홍모 작가가 장기간 취재해서 르포 만화로 그려낸 속칭 ‘파란 바지 의인’ 김동수 씨의 이야기에는, 오히려 가장 선명한 절망의 모습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 설명하는 김 씨는 의인이고 영웅이 아니라, 생존자다. 주변에서 벌어졌던 죽음에 연결되어 있고, 자신이 그들과 다른 결과를 맞이했음에 복잡한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어쩌다 보니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초인적 의지로 사람들을 구해 내던 그 순간은 CCTV 자료와 증언으로만 남아있을 뿐, 당사자는 오히려 충격 속에 기억을 일부 잃었다. 그 대신 남아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가득한 채로 기울어져 가던 그 배의 중앙 홀이다. 생존자로서 이후의 삶을 살아가다가 계속 생각나는 것은 세월호의 기억이고, 그 기억은 반드시 그를 다시 그 홀로 빨아들인다. 그곳으로 마치 떨어지듯, 던져지듯 끌려가는 시각적 모티브의 반복이 특히 절절하다. 죽음과 생존의 부조리가 주는 트라우마는 이후에 사건이 처리되던 방식, 자신의 목소리가 다뤄지던, 아니 다뤄지지 않던 방식을 보면서 더욱 커졌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좌절과 자해의 절망적 이야기가 일상의 순간순간을 통해 누적된다.

  하지만 이것은 불행의 전시가 아니라 훨씬 더 큰 이야기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그 순간의 기억이 있는 상태로, 삶은 계속된다. 피해자 대책과 더 깊은 진상조사를 위해 시위하는 당사자의 경과가, 세월호 기억 플래시몹을 조직하고 이후 인명구조원이 되는 딸의 시점과 합쳐진다. 사회의 대처는 아직도 충분하지 못하여 계속 운동을 하게 만들고, 트라우마는 여전히 김 씨를 홀로 당기지만, 완전히 끌려들어가지 못하게 붙잡아 주는 이들이 있다. 이야기 안에서 그것은 그의 아픔을 이해한 가족들이다. 이야기 밖에서 그것은, 이런 작품을 통해서라도 생존 피해자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직시하고 납득하여 그들을 붙잡아 주는 우리들 모두여야 할 것 같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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