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확장 가능한 이야기

해석 콘텐츠 직접 제작

‘믿는 척하는 사람들’의 세계

 

  ‘ae는 우리가 일상에서 인터넷에 올린 데이터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자아다. 그렇다면 ae는 인간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을까?’ 사르트르의 실존주의까지 등장한 이 심오한 철학적 고찰은 아이돌 그룹 ‘에스파’의 세계관을 해석한 내용이다. 이러한 설명은 기획사가 공개한 공식 영상뿐만 아니라 팬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세계관 해석 콘텐츠는 팬들 사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김작가 문화평론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창작물에 독자적 해석을 하려는 시도는 인간의 본능”이라며 “해석 콘텐츠가 인기를 얻는 건 마니아 문화의 자연스러운 일면”이라고 말했다.

  팬들은 아이돌 세계관을 단순히 수용하는 것을 넘어 직접 분석에 참여한다. 뮤직비디오 해석 콘텐츠 유튜브 채널인 ‘김일오 15KIM'을 운영하는 김일오 씨가 제작한 아이돌 ‘에스파’ 세계관 정리 영상은 50만 조회 수를 달성했다. 그는 영상에서 에스파의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통합 세계관 ‘SMCU(SM Culture Universe)’와 에스파 세계관 설정 속에 등장하는 개념어에 대해 설명한다. 영상을 보며 팬들은 ‘교수님 필기 다 했습니다’ 등의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플랫폼을 통해 팬들은 서로의 의견을 모으고, 더 나은 해석은 없는지 고민하며 팬덤 문화를 더욱 단단히 형성해 가고 있다. 이동배(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세계관은 수용자들의 참여를 이끌며 충성심과 결속력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유튜브 조회수 50만을 달성한 김일오 씨의 에스파 세계관 해석 영상의 썸네일

 

팬, 수용자 넘어 제작자 되다

  팬들은 세계관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K-POP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분석하며 그들의 스토리텔링에 빠져든다. 아이돌 뮤직비디오나 앨범을 보며 세계관에 담긴 의미에 집중하는데, 소속사에서 공개한 티저, 뮤직비디오, 콘셉트 트레일러 속 흔히 ‘떡밥’이라 불리는 은유를 파헤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추측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교하기 위해 해석글을 읽어보기도 한다. K-POP 팬인 김서연(여·21) 씨는 “커뮤니티에서 세계관 해석글을 찾아본다”며 “서사를 이해하면서 아이돌에 대한 정보를 한층 더 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돌 ‘엑소’의 팬이었던 김민 씨(여·21)도 “활동 공백기 때 세계관과 관련된 콘텐츠를 보며 심심함을 달랜다”고 말했다.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 본인이 직접 세계관을 설명한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세계관 해석글을 작성한 김청예(여·29) 씨는 “티저를 보고 나름대로 세계관을 추측한다”며 “정확히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해도, 이해 과정이 설레는 것 같다”고 말했다. 2년째 세계관 분석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고 있는 김일오 씨도 “아이돌의 서사를 분석하는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며 “세계관과 관련해 공개된 모든 공식 영상을 참고한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세계관에 대해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행위는 팬덤의 결속력을 높인다. 김민 씨는 “다른 팬들과 함께 세계관에 집중해 단서를 맞춰가는 것이 보람차다”며 “혼자서 해석하는 것보다 다 함께 얘기하는 것이 훨씬 재밌다”고 말했다. 전문가 역시 세계관을 통해 팬들이 서로 더욱 끈끈해진다고 말한다. 이융희(청강문화산업대 만화콘텐츠스쿨) 교수는 “세계관은 ‘믿는 척하는 사람들’의 것이기에 ‘우리 팬덤’이라는 집단의식이 생긴다”며 “팬들이 ‘팬덤’으로 집단화하는 것도 그 단면”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매료된 팬덤

  연작 앨범 발매 역시 팬들을 세계관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다수의 아이돌 그룹은 매번 앨범을 발행할 때마다, 이전 앨범에 이어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돌 ‘방탄소년단’의 ‘학교 3부작’, ‘화양연화 pt1, 2'나 여자친구의 ‘학교 3부작’이 대표적이다. 방탄소년단은 ‘화양연화 시리즈’부터 ‘Love yourself’까지 상처를 가진 청춘들의 극복 서사를 이어간다. 여러 뮤직비디오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스메랄도 꽃, 라이터, 초코바 등의 오브제를 통해, 앨범이 이전 앨범과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음을 알려준다. 앨범 속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에도 힌트가 있다. ‘Wings’ 앨범의 첫 곡은 ‘Intro···’인데, 마지막 곡은 ‘Outro···’가 아닌 ‘Interlude···’다. 끝이 아닌, 이어질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다음 앨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한 것이다. 이렇듯 한 앨범에서 드러난 스토리가 다음 앨범에서 이어지고, 또 다음 앨범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팬들의 앨범 소장 욕구를 불타게 한다. 엑소의 앨범을 연속으로 구입한 안수현(여·21) 씨는 “연작 앨범은 사 모으는 재미가 있다”며 “다음 앨범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팬들의 뜨거운 반응에 기획사들도 계속해서 연작 앨범을 발매하는 추세다. 러블리즈, 세븐틴, 빅스 등 많은 아이돌이 시리즈를 통해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을 펼친다. 러블리즈의 ‘소녀 3부작’은 데뷔곡 ‘Candy Jelly Love’부터 ‘안녕(Hi~)’, ‘Ah-Choo’까지 이어진다. 빅스 역시 ‘콘셉션 3부작’에서 질투의 화신, 권력의 신, 암흑의 신 콘셉트를 이어가기도 했다. 정지은(조선대 K-컬쳐공연·기획학과) 교수는 “기획사는 하나의 앨범에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담긴 어려워서 연작 형식을 많이 채택한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소비자의 기대를 증폭해 앨범 발매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엑소는 여러 앨범 속에서 자켓사진, 가사 등으로 '초능력 세계관'을 표현한다

 

다양한 ‘떡밥’으로 무한한 해석 가능

  세계관 해석에 정답은 없다. 소속사는 가사, 공식 영상 등을 통해 세계관과 관련된 요소들을 ‘은근히’ 심어 두고, 해석의 여러 갈래를 열어 둔다. 팬들은 흔히 ‘떡밥’이라 불리는 단서들을 찾아가며 뮤직비디오 속 등장한 소품의 의미를 추리한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에 따라 세계관은 끝없는 확장 가능성을 지녔기에 팬들의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동배 교수는 “한정적으로 시공간과 등장인물을 그리는 것은 이야기의 확장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며 “세계관은 가변성이 있기에 무한히 펼칠 수 있고,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팬들은 다채로운 해석을 시도하며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애쓴다. ‘팬-아이돌’ 서사로 분석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아이돌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인물을 팬에 대한 은유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엑소 멤버인 백현의 솔로콘서트 비디오에서 백현의 상대역인 여자주인공은 엑소의 팬덤인 ‘엑소-엘’을 의미하는 듯 보였다. 백현이 프러포즈를 하는 반지에 각인된 글자는 ‘L’이었는데, 이는 엑소 팬덤 이름에 있는 ‘엘’을 떠올리게 한다. 또 아이돌 온앤오프의 ‘signal’, ‘사랑하게 될 거야’ 영상에서 기억을 잃은 로봇인 온앤오프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소중한 존재인 ‘너’가 등장하는데, 이때의 ‘너’가 바로 팬을 의미한다는 추리가 있다. ‘팬-아이돌’ 서사를 풀어가며 팬들은 아이돌 세계관에 더욱 몰입한다. 김민 씨는 “세계관 스토리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팬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점이 좋았다”며 “아이돌에게 팬이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어, 이런 의미부여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팬덤은 단순히 콘텐츠를 수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해석을 가미하며, 새로운 콘텐츠도 생산하고 있다. 김작가 평론가는 “세계관은 계속해서 콘텐츠를 재창출할 여지가 있는 상품”이라며 “공식 콘텐츠 이외에도 앞으로 팬덤이 재해석하고 창조해낸 콘텐츠가 활성화되면서, 팬덤의 연대감은 강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이성현 기자 saint@

사진 | 문도경 기자 dodo@

사진제공 | 김일오, SM엔터테인먼트

일러스트 | 장정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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