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나 폴러스의 그림책 <꽃들에게 희망을>은 밝은 노란색의 표지와 희망찬 제목을 갖고 있지만, 나의 기억 속엔 여전히 공포로 남아있다. 나는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애벌레를 응원하고 있었다. 밟히고 떨어져도, 주인공 애벌레를 응원했다. 그리고 그 애벌레가 끝내 정상에 올라서서 결국 그 어떤 무엇이 아닌 주변의 수많은 애벌레 탑을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다. 나는 무엇을 응원했던 것일까. 수많은 애벌레 탑의 이미지는 그 후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법적 성인으로 살고있는 지금까지도. 나는, 애벌레 탑의 애벌레일까, 번데기를 만드는 중일까, 아니면 사실은 이미 변태(變態)를 끝낸 그저 보통의 나비일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았던 시기가 없었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벅차오르던 사건과 시간은 있었지만, 사실은 너무도 치열하고 불안했던 시기들이었다. 모두 ‘돌아보니 좋은 시간이었다’고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나보다 어린 세대들을 보면 그저 빛나 보일 만큼 나이가 들어버렸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또 그 시간을 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후회되는 일도, 미련도 많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런 일은 바로 어제도 있었다. 

  살아낸 시간이 축적되어도 여전히 처음은 존재하고, 서툴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어른이’가 되기로 했다. ‘어린이’라는 소수자를 모두 서툴고 어리숙한 계층으로 통칭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나는 반대로 어른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한다. 진지한 조언도,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도, 소회도 ‘라떼’와 ‘꼰대질’, ‘감성팔이’로 ‘필터링’ 되는 시대에서 그저 모두 어린이가 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결과라는 말이다. 사실 오늘은 각자가 살아 온 인생에서 가장 성숙한 날임에도, 그 결과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기꺼이 ‘어른이’가 된다. 도망갈 구석이 필요하기 때문에. 으레 그 시기가 되면 갖추어야 할 ‘어른스러움’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아니, 그런 건 집과 차, 직위보다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계속 ‘어른이’여도 괜찮을까. 젠더 갈등과 오해, 경제 만능, 정치 중립의 이상화, 이념대립과 적대화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한다며 첨언하지 않고,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면 괜찮을 걸까. 아직 애벌레여도, 번데기여도, 그저 보통의 나비여도, 그래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살아낸 시간에 미안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힘들게 견뎌냈는데 결국 그 시절보다 철이 없는 것이 마냥 미화될 일인가 싶다.

 

<늘품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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