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일상을 넘나드는 기록

학생들의 끊임없는 성찰

“동기들아, 잘살아 보자!”

 

한국사학과 학생회실에 보관된 연도별 ‘열린마음’이다. '열린마음'에는 당대 학생들의 소소한 일상부터 진지한 고민이 적혀있다.
한국사학과 학생회실에 보관된 연도별 ‘열린마음’이다. '열린마음'에는 당대 학생들의 소소한 일상부터 진지한 고민이 적혀있다.

   본교 국제관 1층에 위치한 한국사학과 학생회실 한 켠에는 ‘학과 내 일기장’이 있다. 한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잡기장, ‘열린마음’이다. 이는 1989년, 한국사학과가 사학과로부터 분과되기 전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지금도 학생회실의 책상 위에는 2021년의 ‘열린마음’이 놓여있다. 한국사학과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학생들은 매년 새로운 공책에 그들의 ‘열린마음’을 채워나가고 있다. 94년도 회장을 맡았던 이창섭(한국사학과 92학번) 교우는 "개인의 일기장이자 한국사학과가 자율적으로 관리한 학과 공동의 일기장"이라고 당시의 '열린마음'을 회상했다. 시험을 망친 이야기부터 기대하던 행사 이야기까지. 일상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 잡기장이라 그런지, ‘열린마음’을 읽다 보면 그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설레는 마음으로 ‘열린마음’을 펼치면 이 글귀부터 눈에 띈다. “여러분 ‘열린마음’을 깨끗이 그리고 솔직담백하게 씁시다.”

 

 

1991년 5월투쟁 당시 학생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991년 5월투쟁 당시 학생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5월 투쟁, 분노하는 마음

  “피맺힌 함성으로 목숨 바칠 각오로 나서야지.” 1991년 5월 1일 ‘열린마음’에는 ‘5월투쟁’의 함성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1991년은 민중의 분노가 극에 달한 연도였다.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였던 정국을 여대야소로 바꾸기 위해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사건과 한보그룹이 정치인과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며 무주택 서민에게 분양하기로 했던 수서지구를 특혜 공급받아 막대한 이익을 챙긴 ‘수서비리’ 사건이 있었다. 그러던 중 1991년 4월 26일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던 강경대(명지대 91학번) 열사가 사복경찰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약 50일간 이뤄진 집회와 시위가 ‘5월투쟁’이다. 

  본교에서는 4월 27일에 첫 규탄 집회를 시작했다. 당시 ‘열린마음’에는 투쟁 당시 학생들이 느꼈던 감정이 나타난다.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한다. 가슴에 단 검은 조기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며 불의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었다. 투쟁하며 나아갈 각오를 적어놓기도 했다. “정말 열심히 투쟁하기로 약속했다. (중략) 나의 대학 생활. 낭만과 학구열로 불탈 줄 알았던 그때의 기대들. 지금은 없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값진 투쟁이라는 것이 나에게 다가와 있다.”

 

  피맺힌 함성을 부르짖는 마음

  1995년 11월의 ‘열린마음’에도 투쟁의 나날을 기록한 일기가 가득하다. “학살자는 민중의 힘으로만 완전히 처단될 수 있다. 그대들이여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무엇을 해야 하나?” 1995년 전개된 ‘5·18 학살자 처벌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15년 전부터 꾸준히 ‘5·18항쟁 진상규명’을 주장해왔다. 학생들은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가 가까워지자 1995년 5월부터 연말까지 본격적으로 시민과 함께 집회·시위를 이어갔다.

  11월 3일 본교 민주광장에서도 학생의 날을 맞이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수사와 5·18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대회가 개최됐다. 이틀 뒤 ‘열린마음’에는 투쟁에 나섰던 학생의 기록이 남아있다. “집회에서 한 연사가 11월 대장정이 시작됐다고 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모습이 우리에게 펼쳐질 것이다. 아니 우리가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투쟁에 나서는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하면서 느낀 두려움을 ‘열린마음’에 적어두기도 했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나면 난 비겁해진다. 너무 무섭다. 하지만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내 의지가 조금이나마 남아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데모할 때는 두 개의 전쟁이 이뤄진다”며 자기 자신을 성찰했다. 학생들은 투쟁에 나서기 전 다짐했다. “이 땅 청년의 양심을 가지고, 그리고 이 땅 청년의 기상으로서 투쟁해야지.”

2000년, 4·18 구국대장정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의 기록이다.
2000년, 4·18 구국대장정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의 기록이다.

 

  역사 정신을 되찾으려는 마음

  “어제 ‘4·18정신! 계승! 투쟁!’을 외치며 거리를 누비었다. 4·18 정신이란 무엇인가? 내가 40년 전에 시위에 나가서 죽을 수 있었을까?” 2000년의 학생들은 1960년의 시위를 돌아본다. 1960년 4월 18일, 고대생들은 당시 정권에 저항했다. 이들은 독재와 불의를 규탄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했으며, 학교로 돌아오는 와중 정치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했다. 평화적 학생 시위에 가해진 폭력은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고려대학교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4월 18일 ‘4·18 구국대장정’을 진행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최근에는 행사가 진행되지 않지만, 2019년까지만 해도 ‘4·18 구국 대장정’은 ‘고대정신’을 대표하는 행사 중 하나였다.

  2000년 4월에 쓰인 ‘열린마음’에는 ‘4·18 구국 대장정’ 행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들의 고민이 담겨있다. “점차 희미해져 가는 역사성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본적인 질서 의식, 교통체증을 야기한 것에 대한 미안함조차 보이지 않는다. (중략) 즐겁지만 왠지 아쉬운... 어쨌든, 각자의 경험이니 ‘소중한 한순간’ 혹은 ‘변화의 계기’였으면 좋겠다.” 학생들은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지 못하고 4·18이 그저 이벤트가 되어가는 현상에 우려를 내비치기도 했다.

 

  일상을 기록하려는 마음

  ‘열린마음’을 보고 있으면 그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993년 4월 1일, “요새 015B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다닌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듣던 시절의 메모다. 1995년 11월 5일에는 추억의 삐삐가 등장한다. “환송회 약속이 11시인데 늦게 왔더니 아무도 없다. 녀석들에게 삐삐를 쳐도 응답은 오지 않고.” 휴대전화가 보급되지 않았던 그 시절, 약속에 늦은 친구에게 삐삐를 치던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 시기에는 일명 ‘삐삐용어’를 상대방에게 보내면, 상대가 확인하고 근처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하는 형태로 연락을 하곤 했다. 같은 해 11월 15일에는 서울에 지하철 5호선이 개통됐다. ‘열린마음’ 속에는 5호선이 개통된 첫날,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려다가 개통 시간을 착각해 수업에 결석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늘 5호선이 개통된다길래 집에서 늦장 부렸더니, 오후 1시부터란다.” 2001년 ‘열린마음’에는 학과 활동에 학우들이 참여하길 바라는 장난스러운 기록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 주 금, 토, 일 농활을 갈 예정입니다. 다들 아시죠. 직접적으로 돌리지 않고 말합니다. 같이 갑시다.”

  2006년 5월 9일 자 ‘열린마음’에는 미군기지 이전으로 발생한 평택 ‘대추리’ 시위가 언급된다. “평화로운 캠퍼스에서의 ‘나’와 삶의 터전을 폭격으로 빼앗긴 평택 주민들에게 오늘의 의미가 같을런지, 다시 생각해 본다.” 학생들의 일상 속 생각이 ‘열린마음’을 채웠다. 2000년대를 지나오며 ‘열린마음’은 서서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 월드컵을 맞아 선수팀의 경기력을 분석하던 2006년, “애니팡 재밌어!”라며 이젠 추억이 된 게임을 즐기던 2012년, 평창 올림픽을 기대하던 2018년. 학생들은 시대의 모습을 담는다.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20, 21학번 학우들아,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를 내뱉어 보자."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20, 21학번 학우들아,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를 내뱉어 보자."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열린마음’

  시대는 변하고, 학생도 변한다. 학생들이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열린마음’이 이전만큼 활발하게 사용되지는 않는다. 매년 학생회실을 처음 방문해 과거의 ‘열린마음’을 펼쳐본 학생들은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은 (비교적) 가볍고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지고 있지만, 더불어 어려운 이야기도 같이 나눠볼 수 있는 장소로 만들자.” 2014년의 기록이다. 2016년의 한 학생은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공책이 가득 차 두 번째 공책이 마련된 것을 보고 “이것은 SNS라는 신기술이 등장한 이래 거의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며 감탄하기도 한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학교에 오지 않는 지금은, ‘열린마음’이 더더욱 휑한 느낌이다. 김태은(문과대 한국사20) 씨는 "'열린마음'은 한국사학과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의 정체성"이라며 "코로나19 때문에 학교에 갈 일이 거의 없어 '열린마음'을 자주 못 쓰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2020년 ‘열린마음’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2021년, 새로운 ‘열린마음’이 시작됐다.

  학생회실을 방문한 학생들은 선배들의 지난 기록을 훑는다. 역사를 기록했던 ‘열린마음’은 여전히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같이 고민을 해보지 않으실래요?” 1993년의 '열린마음'에 누군가 남기고 간 말이다. 오늘도 학생들은 공책을 펼치고, 펜을 든다. ‘열린마음’은 현재진행형이다.

 

글·사진 | 엄선영·윤혜정 기자 press@

인포그래픽 | 유보민 기자 e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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