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의 우연한 도전

서울 곳곳에 자리한 노란 우체통

“고민에는 정답이 없어요"

조현식 대표는 "'세상에 한 명쯤은 나를 응원해주고 있구나', '적어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구나'를 느낀다면 그것이 최고의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조현식 대표는 "'세상에 한 명쯤은 나를 응원해주고 있구나', '적어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구나'를 느낀다면 그것이 최고의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려지는 지점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은 고즈넉한 돌담에 기대어 있는 샛노란 우체통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소중한 고민을 익명으로 보내주시면 느린 손걸음으로 답장을 보내드립니다’라는 동화 같은 안내 문구와 함께 나란히 놓인 이 노란 우체통의 이름은 ‘온기우편함’이다. 

  거리를 지나다 노란 우편함을 발견한다면 편지를 부쳐 보자. 우편함 옆에 놓인 상자에서 펜과 종이를 집어 들고 어떤 고민이든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름을 밝힐 필요도 없다. 마지막으로 주소를 적어서 우체통에 넣으면, 3주 후 ‘온기우체부’가 직접 쓴 손편지 답장을 받게 된다. 손편지의 소중한 온기를 다시금 세상에 전하고 싶어 대학 시절 직접 삼청동 돌담길에 우체통을 놓은 조현식 온기우편함 대표를 만나, 온기우편함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돌담길에 놓은 우체통 하나

  조현식 씨가 온기우편함을 통해 익명의 편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을 보내던 2017년부터였다. 그는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이 학업에 열중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뚜렷한 목표는 없었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부단히 노력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내려 노점상 운영도 해보고 자원봉사도 하는 등 새로운 일들에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좀처럼 걱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온갖 일에 도전해봤지만 진정 가슴이 뛰는 일을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늘 흔들리고, 하지만 또 새롭게 도전하고. 불안과 도전의 연속인 대학 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온기우편함을 설치하게 된 것도 그의 수많은 도전 중 하나였다. 어느 날 고민을 한 아름 지고 삼청동 돌담길을 걷던 도중, 문득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우체통이 그곳에 놓여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시작이었다. 그는 돌담길 가운데에 우체통을 설치하고 무작정 기다렸다. “편지가 10통만 와도 너무 감사할 것 같았어요.” 첫 일주일만에 모인 편지 수는 예상외였다. “우체통에 70통의 편지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우리 사회에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이 너무 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 일을 해야겠다 결심하고, 10명의 자원봉사자를 온기우체부로 모집해 작게 시작하게 됐어요.” 

 

 

 

저마다 다른 고민의 주파수

  조현식 씨는 첫 편지의 내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한 대학생 ‘온기’의 고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일을 하는 게 맞을지 고민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온기우편함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첫 답장에 저의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고스란히 써 내려갔어요. 저도 똑같이 방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를 믿고 이 일로 길을 찾아가고자 한다는 다짐을 솔직하게 전해드렸죠.” 

  그렇게 출발한 온기우편함은 점점 밀려드는 편지량에, 현재는 200명의 온기우체 부가 답장을 쓰고 있다. 온기우편함 활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지금은 삼청동 돌담길 이외에 노량진 학원가, 신림동 고시촌, 혜화동, 서울어린이대공원, 명동 우표박물관, 우체국콜센터 등으로 우편함이 확장됐다. 다양한 장소적 특성을 고려해 우체통을 설치한 것이 눈에 띈다. “특정 지역에 어떤 사람이 많이 올까 고심하며 위치를 선정했어요. 신림동과 노량진에는 고시를 준비하는 청년의 고민이 많고, 어린이대공원은 가족 단위로 대부분 방문하니까 어린 친구들부터 부모들의 고민이 다양하게 들어와요. 우체국콜센터의 경우 한국우편사업진흥원과 일을 하면서 콜센터 직원의 감정소모 문제와 고충을 알게 됐어요.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감정을 채워주는 심리적 복지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에 우체국콜센터에도 온기우편함을 설치하게 됐어요.” 

  장소가 다양한 만큼 위치별로 고민의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고시촌 우편함에는 무기력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또 고시를 준비하지만, 이 길이 맞나 회의가 든다는 내용도 자주 있죠.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는 어린 친구들이 구구단을 잘하고 싶다, 수학을 잘 못해서 걱정이라는 편지를 보내요.” 한편 조현식 씨는 우체국콜센터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고민에 유독 마음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고객의 민원에 어떻게 잘 대응할 수 있을지, 고객을 대응하며 소모되는 감정을 어떻게 채우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이 많아요. 감정이 많이 소모되는 일을 하다 보면 정작 나의 감정을 돌보는 데 소홀해져 쉽게 지칠 수 있다는 점이 많이 공감돼요.”

 

정답만이 최선은 아니기에

  온기우편함의 답장은 ‘정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이는 조현식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이다. “온기우체부 교육을 진행할 때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말씀드리는 원칙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하세요’ 또는 ‘~하지 마세요’와 같이 정답을 정해놓고 답장을 쓰는 것을 절대 지양하고 있죠. 삶에는 정답이 없으니까요. 대신 비슷한 고민을 한 경험을 같이 적어요. 답장을 받는 온기님들이 ‘그래도 세상에 한 명쯤은 나를 응원해주고 있구나, 적어도 누군가와 연결돼 있구나’를 느낀다면 그것이 최고의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조현식 씨는 온기우체부에게 여러 개의 편지에 답장을 쓰는 것보다 하나의 편지에 더 많은 진심과 정성을 담을 것을 강조한다. 실제로 온기우체부는 답장 하나를 쓰는데 평균 2시간 정도를 들이며 정성스레 작성한다. 

  앞으로 온기우편함은 더 많은 이들의 고민에 답장을 전하기 위해 ‘내부로 들어가는 우편함’이 될 수 있도록 계획하는 중이다. “시청 안, 카페 안 등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공간이면서도 조용히 고민을 떠올리며 편지를 쓸 공간을 찾아보고 있어요. 저희가 역량이 된다면 더 많은 분의 고민을 세심히 들어드리기 위해 확장해나가고 싶습니다.” 

  직접 삼청동 돌담길에 한 대학생이 우체통을 놓으며 시작된 온기우편함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따스함을 선물하고 있다. 휴대폰 자판으로 보내는 손쉬운 메시지를 잠시 접어두고, 기꺼이 연필을 들어 손편지를 쓰는 마음에는 수없이 많은 말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타 하나 없는 반듯한 문자메시지 한 통보다 쓴 사람의 호흡이 그대로 느껴지는, 흔들린 글씨에서 전해지는 마음을 마주하고 싶을 때, 선뜻 먼저 소중한 이를 떠올리며 손편지를 적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박다원 기자 wondaful@

사진 | 김예락 기자 emancipate@

사진제공 | 조현식 대표

일러스트 | 장정윤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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