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이 감탄하는 한국 제품 중에 ‘커피믹스’가 있다. 원래 미국에서 전쟁 중에 군인들에게 음료로 술 대신 가루 커피를 지급하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2차대전 경에는 새롭게 발전한 분유 기술로 비로소 제법 먹을만한 인스턴트 커피를 만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스틱형 믹스커피로 만든 건 한국의 기업으로, 지금은 역으로 한국의 믹스커피가 세계 인스턴트 커피의 표준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됐다.

  한국 믹스커피의 핵심은 역시 맛이다. 불량식품에 가까운 미국 믹스커피와의 차이가 이것인데, 한국 믹스커피는 나름 질 좋은 원두에 설탕과 프림을 완벽에 가까운 비율로 배합해 절묘한 맛을 낸다. 바로 그 배합. 딱 ‘적당한’ 그 배합이 핵심이다. 오랫동안 음악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굳어진 미학의 기준점이 있다. 클래식의 경우에는 독일, 대중음악의 경우에는 소위 ‘영미권’이라고 하는 미국과 영국의 대중음악이 그것이다.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각의 장르에서 원조의 지위를 인정받는, ‘경전’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이기에.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것을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늘 절대적 모범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미국 음악을 들으며 ‘저 가수는 왜 저런 이상한 이야기를 할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굳이 외설적인 복장을 할까’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내 예술적 취향의 저열함을 고백하는 것 같아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 지금이라고 아주 다른 것은 아니다. 내가 음악을 듣고, 평가하고, 분석하는 방식은 문화 선진국들이 만들어 놓은 취향과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배우고자 유학도 갔고, 그 욕망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중음악을 알고 싶거나 만들고 싶은 모든 사람이 모두 가진 것이다.

  그런데 최근 BTS나 블랙핑크 등 케이팝의 득세와 한국인이 아니라면 그 정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오징어게임과 같은 한류 드라마의 세계적인 열풍을 보며 새롭게 떠오른 생각이 있다. 우리가 늘 고정적인 미학의 지향점, 그러니까 나침반의 자북과 같은, 좌우로 정렬의 기준과 같은 것으로 여기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을 한국이 대체할 날도 그다지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아직 섣부른 생각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벌어지고 또 변하고 있다. 앞으로 5년, 10년 안에는 또 어떤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질지 모른다. 블랙핑크나 에스파,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브레이브 걸스나 스테이씨 같은 새로운 세대의 걸그룹을 보면 그 안에는 세계적인 유행인 ‘걸 크러쉬’의 감수성이 녹아있다. 2021년 한해 최대 히트상품 중 하나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의 열풍도 비슷한 맥락이다. 남자에게 보여주는 예쁨이 아닌, 같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로부터 존중을 얻어내는 새로운 종류의 멋짐이 핵심이다.

  예전 같으면 나는 그것을 미국 흑인들을 모방하다가 어설프게 그친 ‘짝퉁’의 미학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같은 걸크러쉬지만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묘한 균형미와 절제의 미가 엿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예술가들이 미국을 완벽하게 모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은 설령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한국만이 가진 ‘적당 미’에 대한 감수성이 발동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새로운 관점이다. 미국이 개발한 믹스커피의 완벽한 배합을 한국이 찾아냈듯,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대중문화의 완벽한 배합을 우리가 먼저 찾아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기준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김영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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