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논
<아논>

별점: ★★★★☆

한 줄 평: 우리 옆의 미래, 굴절된 인식, 아무나와 누구나


  당신이 보고 듣는 것은 전부 녹화된다. 심안을 통해서, 당신은 당신 삶 속의 일상적인 편린들마저도 저장하고 기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재생하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다. 당신의 눈을 누군가가 빌릴 수 있고, 당신 역시 타인의 눈과 귀를 뺏을 수 있다. 여기 한 형사가 있다. 심안을 써서 사건을 추적하고 용의자를 심문한다. 모든 사람의 눈과 귀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그에게 있다. 그런데 형사의 눈앞에, 등록되지 않은 익명의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심안을 해킹해서 사람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나타났다는 보고를 전해 듣는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성질이 최대한으로 보장받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전자기기를 켜고 손가락을 움직이면 금방 나와는 다른 아바타가 가상공간 속에 설정된다.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 현실의 나에게 남겨지는 것은 없다. 한편 <아논>에서 그려내는 세상은 독특하다. 무엇을 하든 기록에 남기 때문에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가 사소한 일탈을 저지른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조작하길 원한다. 마약을 한 사실을 없애거나, 바람을 피운 적 없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없애 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 누군가가 바로 <아논>. 작품의 제목이자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해커다.

  형사는 유력한 용의자인 아논을 쫓는다. 가짜 신분을 만들고 일부러 매춘부를 불러들여 일을 의뢰한다. 계획이 성공하려던 찰나, 기억을 해킹하여 형사의 정체를 파악한 아논은 덫에서 빠져나가고 복수를 시작한다. 형사는 눈앞에 불길이 치솟고 발밑에는 쥐 떼들이 우글거리는 환영을 경험한다. 주변의 공간은 일그러지고 현실을 분간할 수 없다. 더군다나 과거의 기록들까지 삭제된다. 죽은 아들과 지냈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사라진다.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 기록되는 세상은 언뜻 편리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서워진다. 나의 감각과 인식이 통제된다. 내가 보는 세상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 형사가 경험한 환각처럼, 그것은 끔찍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계단의 개수가 갑자기 늘어나고, 정차된 차량 속 사람들이 사라지고 귓가엔 열차의 도착 신호음이 울린다. SF 영화 속 장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휴대폰을 보며 걷다가 맨홀에 빠지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는 사람. 우리 세상 속에서 이미 전자기기들은 사람들의 감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젠 놀랍지도 않은 일이 되었다. 오히려 전자기기 속에 몸을 숨기지 않는 이들이 사람들의 평균과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아논은 형사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사람들 속에서 사라지는 법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수백, 수천 개로 쪼개어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숨겨둔다. 수만 분의 1초에 불과하기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온라인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사람들 속에서 너와 나는 다르게 기억된다. 거울 속의 나와 카메라 속의 나,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의 나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나는 다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숨기고 ‘아무나’가 될 수 있다. 아니, ‘누구나’가 ‘아무나’가 될 수 있다. 

  수 세기 전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숲과 바다로, 들과 산으로 향했다. 오늘날 같은 목적의 사람은 사라지기 위해 사람들 속에 자신을 숨긴다. 사람의 눈이 전부 감시카메라나 다름없는 <아논>의 세계에서도, 익명성은 존재한다. 아논은 사람들 속에 아주 잘게 흩어져 있다. 모든 사람 곁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인식하지 못한다. 익명(匿名). 이름 없는 여자 아니면 남자일 수도 있다. 때론 이름 없는 형사, 또는 이름 없는 매춘부일 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달과 인구의 증대는 정보의 바다와 사람들로 이루어진 숲을 제공해 주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가면을 쓰고, 이름 없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사람이 될지는 당신의 책임이다. 태어나기 전에 받은, 선택할 수 없었던 이름과 달리 익명의 이름표에 글씨를 새겨 넣는 사람은 당신이 될 것이다.

 

윤승준(문과대 국문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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