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지난여름, 광화문 교보문고 건물에는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나의 그늘도 아직 어려운데,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으려면 얼마의 품을 들여야 하는지를 잠깐 고민하며 그 거리를 지나간 적이 있다.

  이야기는 오랜만의 휴가를 맞이한 과외교사 경진의 학생 해미가 사라지며 시작된다. 해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수업에서, 경진은 해미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경진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약간의 찝찝함을 뒤로 한 채 휴가를 보낸다. 그렇게 무난하게 흘러갈 것 같던 휴가는, 갑자기 모두가 경진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며 이상한 국면을 맞이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경진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경진은 의도치 않게 타인의 구체적 삶의 조각들을 씹어 넘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상견례가 망한 친구도, 취향을 일구는 법을 알게 된 엄마도,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나 찜질방 세신사도. 경진은 자신의 세계가 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틈새로 그들의 이야기를 집어넣는다.

  경진은 그렇게 삶의 목격자가 된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지나쳤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어 그들을 구체적 존재로 만든다. 수없이 얽힌 가변성과 우연성 사이에서 만들어진 삶은 평범하게 불행하고, 또 잔잔하게 행복하다. 평범한 궤도의 사람들이 포착되어 살아 숨 쉰다. 그들의 증언을 지나 다시 해미에게 시선을 돌리면, 해미가 하고 싶었던 말의 무게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 말의 방향은 뱉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에게 달렸을지도 모른다. 휴가가 끝난 후의 경진은 이전과는 다른 듣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경진도 해미도 아닌, 우리가 목격할 이야기들이다.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다들 계란말이를 어떻게 만드시나요?’ 수백 수천 가지의 방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를 썰어 넣는지, 양파와 당근도 들어가는지, 고춧가루를 뿌리는지 아니면 그 무엇도 넣지 않은 폭신한 계란말이를 선호하는지. 어떻게 묶기 힘든 추상적 단위인 우리는 계란말이 하나도 다르게 만든다. 그러니까, 덥고 푹푹 찌고 끈적거리는 여름에 해야만 하는 일은 서로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고. 펄럭거리는 현수막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제는 여름이 다 지나다시피한 오늘에도 유효하다. 내일도 그 내일에도 유효할 것이다.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뻔한 이야기를 꺼내 본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은 개인과 개인의 희미한 연결마저 지워버리는 것 같다. 아무도 없는 곳이 제일 안전한 시대에, 이 책을 통해서라도 아무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를 권유해본다. 계속되는 파란 속에서도 삶을 지탱하는 이들을 보는 일은 일종의 응원 같기도 하다. 어딘가에 자리 잡은 아무의 조각이 또 누군가의 아무를 만들기를. 우리는 아무를 빌어 아무와 함께 살아가기에. 이 글을 읽고 있을 아무의 삶조차 응원하고 싶다.

 

이다미(문과대 국문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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