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난지원금이 전국민의 88%에 지원되었다. 나는 12%에 든다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그 언저리에 있던 여느 사람들과 같이 의아했다. 당시 떠올랐던 생각들을 적어본다.

  #1. 상위 12% 치고는 생활수준이 좀 팍팍한 편 아닌가.

  내 생활 수준에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매달 상당한 금액이 대출이자로 빠져나가면, 소고기는 회삿돈 아니면 식당에선 안(못) 먹는다. 아기의 영어유치원은 꿈도 못 꾼다. 내가 12%라면, 그 이하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허덕이며 살아가는 걸까. 지금의 내 생활수준이 사회의 50%에 위치했다면, 그래도 사회의 대다수는 살만하구나 싶었을 것이다. 생계 위협을 받는 소수는 우리 사회가 더 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도 더 컸을 테다.

  #2. 내가 상위 12%에 속하는데 나의 기여는 얼마나 될까.

  어찌됐든 내가 물질적 수준이 높다는데, 이건 누가 만들어낸 결과일까. 아빠 찬스나 할아버지가 숨겨둔 땅 한 평도 없으니, 우리 어머니가 보기엔 내 자식이 잘난 덕이라고 하실 거다. 하지만, 아픈 부모의 간병에다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그 어느 청년이나, 20살에 보육시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했던 상황이 내겐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제는 회삿돈으로 먹고살기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계층의 사다리를 타는 데 있어 에스컬레이터는 아닐지 몰라도, 완만한 경사의 좀 더 편안한 사다리는 올랐다.

  #3.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회의 절반 이상, 아니 대다수의 삶이 팍팍하다. 잘 사는 사람의 부는 자신의 노력이든 운이든 여러 요소가 작용해 더 큰 부를 만든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불어날 재산도 없고, 본인과 가족의 질병, 실업, 사고 등 작은 위기에도 버틸 재간이 없다.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의 숫자보다 좋은 취업 자리가 줄어들면서 필연적으로 어떤 청년은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끊임 없이 노력하라고 하지만, 끊임 없는 시련이 패배감과 무력감을 주고 결국은 많은 걸 포기하게 만든다.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 교육기회 제공 등 좋은 아이디어들이 제안된다. 지금껏 급속도로 성장해 오며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고, 교육기회도 대폭 확대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 과실을 누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격차도 어느 때보다 크다. 근본적인 부의 이전과 재편이 없이는 해법이 없다. 살아남은 소수만 갖는 그 큰 부를 사회가 나누어야 한다. 내가 주는 사람이 될지 받는 사람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근본적인 구조 개편이 없이는 사회의 해체다. 그 결과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더 큰 피해로 다가온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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