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탈정형화의 산물

문제의식이 캐릭터 입체화해

 

차무진 작가는 "빌런은 작품 속 세계관의 색깔을 구상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차무진 작가는 "빌런은 작품 속 세계관의 색깔을 구상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했다.

  <어벤져스>, <배트맨> 시리즈 등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영화에선 모두 강력한 ‘빌런’이 나타난다. 대중들은 악행을 저지르고 주인공의 행보를 방해하는 인물인 빌런을 보며 분노하는 동시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주인공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이야기 속 빌런의 존재는 주인공의 성장과 작품 완성의 필수 요소다.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를 저술한 차무진 작가를 만나 이야기 속 빌런의 존재 의미와 특징에 대해 물었다.

 

차무진 작가의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
차무진 작가의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

 

  - 이야기 속 빌런에게 특별한 역할이 있나요

  “이야기란 본디 ‘주인공’의 서사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이 고난을 겪고 극복하는 내용으로 전개돼요. 그래서 작품의 시작과 달리 마지막에 주인공은 반드시 성장을 이뤄내요. 대중들은 서사를 간접적으로 즐기며 주인공처럼 성장하고픈 바람을 충족하죠. 이것이 작품의 존재 이유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결코 스스로 성장하지 않아요. 주인공과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빌런’이에요. 빌런은 주인공의 대적자이자 그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에요. 우리가 작품을 대한다는 것은 곧 주인공이 빌런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스토리 창작자들은 ‘영웅’의 서사에만 몰두한 나머지, 빌런은 보조 캐릭터로만 바라봤어요. 하지만 빌런의 신념은 작품 속 세계관의 색깔을 구상하는 핵심 요소에요. 주인공이 마주치는 모든 장애물에는 빌런의 탐욕이 묻어나오기 때문이에요. 또 영웅이 좇는 선은 단편적인 형태를 띠지만 빌런은 작품마다 다른 모습과 매력을 선보여요. 작품의 매력도 빌런으로부터 느껴지는 거예요. 따라서 빌런은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 그렇다면 악인 캐릭터라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건가요

  “악인에는 ‘절대 악’을 표방하는 ‘빌런’과 그렇지 않은 ‘반영웅’이 있어요. 빌런은 주인공과 대적해서 악을 행하는 자로, 극이 정점에 다다를때 응징 당하게 됩니다. 주인공에 의해 제거당하고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캐릭터인 빌런은 절대로 주인공이 될 수 없어요. 반면 반영웅은 내면 속에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으로 종국엔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로, 주인공이 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배트맨> 시리즈의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은 반영웅이에요. 브루스 웨인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복수심에서 촉발된 감정으로 정의를 실현하죠. 따라서 반영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물로 볼 수 있어요. 이들은 작품 속에서 자신만의 빌런을 만나요. 브루스 웨인도 ‘조커’라는 빌런과 다투게 되죠.

  ‘다크히어로’와 ‘안티히어로’는 반영웅의 유형이에요. ‘다크히어로’는 자신의 선함을 좀처럼 내세우지 않는 영웅이며, ‘안티히어로’는 선함을 망각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어요. 영화 <데드풀>의 데드풀은 제멋대로 질서를 어지럽히면서도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이에요. 데드풀은 안티히어로, 배트맨은 다크히어로라고 할 수 있어요, 슈퍼맨처럼 절대적인 선을 표방하고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과는 다를지언정, 다크히어로이든 안티 히어로이든 종국에 선을 행한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악’과 는 대조되는 인물입니다.”
 

  - 요즘 새롭게 나타난 빌런의 양상이 있을까요

  “과거와 비교해 최근 여성 빌런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어요. 과거 여성 빌런은 지극히 모성과 관련된 특징을 악으로 내보였어요. 자신의 가정을 되찾고자 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죠. 아기를 잃은 어머니로 묘사되는 여성캐릭터가 남의 아이를 유괴한다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주인공을 남편으로 삼으려고 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죠. 과거에는 이처럼 여성캐릭터에게 부여된 ‘모성’의 키워드가 위반되면 그가 곧 악당이 되는 서사가 흔했고, 이것이 현대까지 고착화된 채 여성 빌런의 특징을 정형화시켰습니다.

  하지만 최근 전통적인 방식의 ‘한’을 탈피해 부나 명예와 같은 개인적 욕망을 추구하는 등 자신만의 개성적인 악행을 직조하는 여성 빌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드라마 <빈센조>의 최명희, <악마판사>의 정선아가 그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각각 검사와 재단 상임이사라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인물로서, 더 높은 권력을 쟁취하고자 강력한 빌런이 되죠. 정형화된 주인공이 계속 나오는 콘텐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중의 욕구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 매력적인 빌런을 등장시키려면

  “주인공이든, 빌런이든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관찰이 중요해요. 작가가 세상을 주의깊게 관찰한 후 깨닫는 특정한 문제의식이 흥미로운 빌런 캐릭터를 탄생하게 하죠. 빌런은 그러한 문제적 행동을 수행하는 캐릭터인거죠. 개인적 바람으로는 한국 콘텐츠에 자신만의 신념이 확고히 수립된 빌런이 등장하면 좋겠어요.  오늘날 한국 콘텐츠 속에선 강력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악당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워요. 악한 인물은 대부분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단순 사이코패스적인 인물로 묘사되곤 하죠. 그렇기에 뚜렷한 캐릭터성을 지닌 인물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쉬거'는 자신만의 강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쉬거'는 자신만의 강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예를 들면,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청부업자 ‘안톤 쉬거’는 ‘죽음은 곧 신이 부여한 운명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죽이겠다고 결심한 자는 반드시 죽이지만, 우연히 죽음의 운명을 마주한 자에게는 ‘동전 던지기’를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을 부여하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닌, 피할 수 있는 운명이라는 안톤 쉬거의 믿음은 그를 한층 강렬한 캐릭터성을 가진 빌런으로 각인시켜 줍니다. 이렇듯 작가가 가진 문제의식이 구체화될수록, 캐릭터도 더욱 입체적이게 돼요. 다양하고 급변하는 사회인 한국에서도 충분히 저마다의 신념을 가진 매력적인 빌런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글 | 이주은 기자 twoweeks@

사진제공 | 차무진 작가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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