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금이나 미래의 시대를 어떻게 부르든 그러한 시대가 가능하게 되는 밑바탕에는 여전히 과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우리는 그 누구든 과학의 생산자 아니면 소비자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과학은 오늘의 우리에게 누구에게나 ‘피해 갈 수 없는 잔(盞)’이 된 셈이다.

이제 과학의 생산자는 생산을 더 잘 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소비자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과학에 대해 더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역으로 과학의 소비자도 과학의 생산물을 제대로 평가해 안전하고 질 높은 산물을 향유하기 위해 과학에 대해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대에 ‘과학 철학’에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과학은 자연을 탐구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과학 철학(philosophy of science)은 과학 자체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요컨대 과학에 대한 철학이다.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 탐구해 내놓은 그 무엇을 다시 알고자 함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내놓는 과학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 활동은 독특한 방법, 곧 과학적 방법으로써 과학적 지식을 얻는 과정이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러한 방법이란 여타 영역에서의 탐구 방법과 다른 것인가? 만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가? 또 그 방법은 과연 올바른 지식을 얻는 데 정당화될 수 있는 방법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과학의 정체를 밝히려는 과학 철학에 있어 핵심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실험 과학자들은 아보가드로의 수를 어떻게 확정지으며, 이론 과학자들은 양자 역학의 이론들을 어떻게 수립하는가? 현대의 과학적인 원자 이론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인 원자론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천문학이라는 것은 과연 점성술과 다른 것인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방법의 산물로서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도 그 종류라든가, 그 근본적 성격 및 기능, 그것의 신뢰 가능성 등에 대해 다시 따져 물을 수 있다. 대체 ‘과학적 법칙’이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며 ‘과학적 이론’이란 어떠한 구조를 갖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지식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인가? 예를 들어 ‘보일-샤를의 법칙은 어떠한 의미에서 하나의 법칙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과학자들은 대체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인가?’와 같은 문제들이 여기서 다뤄질 수 있다.

나아가, 과학적 지식은 그것이 일단 획득된 후 고정·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사(史)에서 잘 보여지듯 변화·변천돼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점진적인 누적(累積)의 과정인가 아니면 급격한 대체(代替)의 과정인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쿤(T. S. Kuhn)의 ‘패러다임’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한 답변 과정에서 나온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의 문제들은 이른바 ‘과학성’을 추구하는 모든 학문 및 삶의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과학 철학 상의 탐구 결과는 단지 철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타학문 및 삶의 영역으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 사회 과학이나 자연 과학의 표준적인 교과서들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성과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경우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현대의 과학 철학 발흥기인 지난 20세기 초반에는 주로 논리적인 측면에서 그에 대한 해명 작업이 이뤄졌다. 하지만 그와 같은 해명과는 다른 각도에서 과학을 바라보려는 시도로서, 또는 그러한 해명만으로는 메우기 어려운 틈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새로운 측면에서의 과학 철학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지 과학(cognitive science)을 원용해 과학적 발견의 과정을 해명하거나, 사회학적 고찰을 통해 과학적 이론의 선택시 따르는 논란이 어떻게 종결되는가를 규명하려는 사회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의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학적 성취의 성공 여부를 평가하려는 시도들도 볼 만하다.

오늘날 대중은 단순히 과학에 대한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혜택이든 침해든 그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그것을 감시하고 조정하는 능동적인 소비자의 위치에 있으며,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을 매개로 이미 그들의 생활환경 자체가 과학에 의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에서 과학·기술·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를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이른바 ‘STS’의 영역이 좁은 의미의 과학 철학을 넘어 포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생각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과학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시켜 주는 ‘과학 저널리스트’(science journalist)들의 활약이 기대된다. 지금 이 글이 실린 <고대신문> 역시 이미 이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영삼(본교 강사,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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