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라는 것은 도대체 존재하는가? 시간 자체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존재하고 또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한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것이라고 믿고 살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변화, 특히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보고 간접적으로 시간을 체험하면서 사는데 그것이 시간의 부단한 흐름 탓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의 주관적 체험에서 출발해 시간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시간이 시간으로서 구실하는 것은 존재의 어느 차원에서일까?

시간은 적어도 생명이 있고 따라서 그 생명의 종말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존재차원에서라야, 즉 고등생물의 차원에서라야 그 존재의의를 갖는 것이다. 더 좁혀서 말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차원에서라야 시간의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다. 시간의 존재는 인간으로부터 기원한다고 보아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 없이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은 인간의 출현으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요, 따라서 시간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죽음이 각자의 것이듯, 시간도 각자의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나는 그 시간의 어느 시점에서 출생해 어디까지 어느 길이만큼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바쁠 때는 다급하게 또 한가할 때는 느긋하게 나의 독자적 시간을 내가 독자적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의 객관성은 어찌 되는가?

왜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1년은 12달이고, 하루는 다같이 24시간인가?

우리는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태양계 안에 산다. 그러니 태양의 운행주기에 삶의 리듬을 맞추어야 한다. 해가 있는 동안은 일을 하고 밤에는 자야 한다. 처음에는 태양의 운행주기 보다는 달의 운행주기, 즉 그 영허(盈虛)가 쉽게 지각되므로 달의 변화로 세월을 측정하고 뒤에는 태양의 운행주기로 시간을 측정하게 됐다. 이것이 태음력에서 태양력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운행주기를 정밀하게 관측해 1년이 365.25…일(日)임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하루는 ‘낮과 밤’이었으나 점점 그 측정이 정밀화해 12시간(동양의 시간측정)이 되고, 이것이 다시 24시간으로 정밀해진 것이다.

 요컨대 시간을 객관화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은 시간 개념을 갖게 한 것은 태양의 자식들의 생활리듬의 일양화(一樣化)에 의거한 것이다. 이것은 객관시간의 근원이 태양의 운행주기에 따른 인간의 삶의 리듬에 있다는 것이다.

시간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흘러가는 일차원의 흐름이고 또 하나는 영원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후자는 시간을 완전히 초월한 것이므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철학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이 두 계기가 부단히 고려돼 왔다. 그는 정신의 집중을 통해 영원에 닿고 정신의 분산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구명했다. 근세 이후 특히 헤겔 이래 시간을 두 계기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것이 전통처럼 돼있다.

헤겔은 시간을 자연시간과 개념시간으로 구별하고, 베르크손은 공간화되는 동질적 시간과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을 구별하였으며, 후설은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정지하는 지금’(nunc stans)을 구별한다. 하이데거는 마음 씀(Sorge)의 구조에 입각해서 통속적 비 본래적 시간과 본래적 시간을 구별한다.

소광희 (서울대 명예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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