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02 12:02 (목)
고전이 나를 읽고, 내가 세상을 읽는다
고전이 나를 읽고, 내가 세상을 읽는다
  • 고대신문
  • 승인 2004.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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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유물 아닌 성장하는 오늘의 교과서...'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

스무 살의 나이에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느냐’고 어떤 분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 때 그 분은 ‘사람이라는 게, 1천년을 지나도, 2천년을 지나도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따라서 고전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고 말씀하셨다.

 그 분은 이미 세월 속에서 흙이 됐지만, 말씀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우리는 죽어가고 있지만, 고전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는 것처럼.

사람은 정말 그게 그거인 것 같다. 거대한 자연의 진화와 견주어볼 때, 역사 속의 인간의 조건이란 늘 그렇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은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의 전형’을 그리고 있다. 선과 악 속에서 방황해야 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고심하는, 국가 속의 개인으로 선택해야 하는, 욕심과 절제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사람이며, 고전은 그런 사람을 담고 있다.

동양의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대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고 말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스무 살 때의 <논어>와 예순이 넘어서 읽는 <논어>는 다르지 않을까? 마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젊을 때 읽어야지 늙어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청춘에 필요한 것은 노련함이지만, 노년에 필요한 것은 정열이 아닐까? 젊어서는 비난할 수밖에 없었던 공자의 언행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전이 우리에게 주는 일차적인 가치는 바로 이러한 ‘생각꺼리’를 맘껏 제공하는 데 있다.

게다가 고전은 우리 생각의 틀을 짜주고 있다. 아니, 이미 짜놓고 있다. 이를테면 ‘사람은 다 착하다’(유가의 성선설: 性善), ‘소박한 게 좋다’(도가의 소박설: 素樸), ‘따지고 보면 불쌍하다’(불가의 자비설: 慈悲)는 등 일상 속의 표현은 이미 고전에 훈습돼 있는 우리의 사유를 보여준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교육’<맹자>, ‘복귀’<노자>, ‘방황’<장자> 등도 모두 고전에서 나온 말이다.

고전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를 대비해본다면, 교육의 반대말은 형벌이며, 복귀의 반대말은 문명이며, 방황의 반대말은 목적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다. 교육에 반대하면 통제를 지지하는 것이고, 복귀에 반대하면 과학기술을 찬양하는 것이고, 방황을 싫어하면 자본주의적인 이익추구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전 읽기가 어려운 까닭은 우리 현대의 삶이 전통과는 단절됐기 때문이다. 서구 현대가 추구하는 ‘이성’(理性)이라는 번역어만 해도, ‘이치를 추구하는 본성’으로 ‘이’는 이기(理氣)설과, ‘성’은 성리(性理)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탄생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성이라는 말을 쓰면서 성리학적 이기설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됐으니, 동양고전이 서양고전보다 더 어려워 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흔히 고전은 한 사람의 한 뜻으로 고정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장자>와 같은 고전은 적어도 네다섯 학파가 집체창작을 했다고 이해되고 있으며, <논어>만 해도 공자의 수많은 어록 가운데 일정 부분만을 뽑아놓는 발췌창작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 공자가 평생 그만큼만 말했을 리도 없고, 생존연대조차 불분명한 장자가 그렇게 많은 양을 직접 썼을 리도 없다.

그러니 많은 부분은 주석자의 탁월한 설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논어>만 하더라도 성리학적 읽기인 주자(朱子)판이 있고, <장자>는 때로는 스님들이 즐기신 절집판이 따로 있다.

고전은 이렇듯 변화무쌍하게 발전 내지 성장해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앞으로의 해석은 바로 젊은 여러분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누구는 그렇게 말했다. ‘내가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나를 읽었다’(六經皆是吾注: 육경이 모두 나에 대한 해설서)라고.

따라서 고전을 읽을 때, 먼저 자신의 문제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문제없이 책읽기란 하다못해 엘로우 페이퍼라도 재미없게 마련이다. 프로야구에 관심 없는 독자에게 스포츠신문이란 휴지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고전을 읽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읽어라.

얼마 전 귀국한 미국출신의 대학원생이 있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네팔에서 출가했다가 한국에서 다시 철학을 공부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문제를 주면 우리 학생들과는 정말 다르게 풀어 왔다. 참고서나 뒤적거리는 것이 우리의 공부방식이라면, 이 친구는 바로 공자와 플라톤의 저작에서 직접해결을 모색해 자기의 주장을 펴는 것이었다.
 
대학이라는 것이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 모인 곳이라는 점이 확실하다면, 학문을 하는 이에게 고전 읽기란 이렇듯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것은 곧 오늘의 나를 읽는 것이며, 오늘의 나를 잘 읽는 사람만이 고전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재미있게.

정세근(충북대 교수,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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