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캠퍼스는 다른 어느 학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3개의 캠퍼스로 나눠져 있다. 문과계통이 모여있는 인문계 캠퍼스와 이공계 캠퍼스 그리고 녹지캠퍼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캠퍼스가 분리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1905년 5월 보성전문학교로 개교한 본교는 1963년 12월에는 문리과대학이 문과대학과 이공대학으로 분리되면서 1966년 이공대학이 이공계 캠퍼스로 이전했다.

당시 물리과 65학번이었던 김선웅(자과대 물리학과) 교수는 “인문계 캠퍼스와 이공계 캠퍼스까지 오고가는 시간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져 친구들과 농담삼아 인문계 캠퍼스와 이공계 캠퍼스 사이에 케이블카를 운행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왜 캠퍼스는 분리됐을까. 가장 많이 퍼진 해석은 피난민 설이다. 1934년 송현동에서 안암동으로의 교사 이전 당시에 법인측에서 안암동 5가 일대를 모두 매입해 참살이길에서 개운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교 땅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암캠퍼스에 본관과 현 대학원 건물 두 개만 짓고 참살이길 부근은 숲으로 방치한 상태에서 6·25가 일어났다.

전란 속에서 피난을 갔다가 다시 서울에 돌아오니 피난민들이 이미 본교 소유 땅을 점유해 있었다. 본교 캠퍼스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학교 캠퍼스에 피난민들이 판자촌집을 짓고 살았다. 그것을 본 김성수 선생은 그들을 매몰차게 쫓아낼 수 없어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과 60학번이었던 김영상(자과대 화학과) 교수는 피난민 소문은 그야말로 소문일 뿐이라고 말했다.“안암캠퍼스에 본관과 현 대학원 건물만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며“정원수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캠퍼스가 좁아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어 이과·공과·농과 대학이 이공계 캠퍼스로 옮겨가게 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소문은 고대생들이 데모를 너무나 많이 해서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캠퍼스를 분리시켜 놓았다는 설이다.

이에 대해서도 김영상(자과대 화학과) 교수는 “1960년대 입학 정원이 1천명이 되지 않았는데 데모를 하면 얼마나 힘이 있었겠냐”며 지적을 했다. 이어“안암동으로 이사왔을 당시 안암동 로타리에서 개운사까지 주택지였다”며“캠퍼스 분리는 처음부터 교지를 마련할 때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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