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이 문화적인 지식이나 감정표현의 절제, 우아한 말과 행동이라는 생각은 봉건적이다. 그것은 결국엔 유한계급의 사회적인 메이크업 일뿐이다. 아마도 교양이란 사회적인 분별력일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뜻과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 그게 교양이다.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 이다”  (김규항, <B급 좌파>중에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한 후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바로 ‘교양’이다. 교양과목, 4.18 교양 등 학교 안에는 교양이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때로 교양이 자본의 일종으로 전락한 감도 없지 않다. 많은 종류의 책들이 ‘교양인을 위한 무엇’을 표방하고 있다. 마치 ‘이 책을 사서 읽지 않으면 넌 교양인이 아니야’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교양이 무엇인가?’ 라고 물어봤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교양이란 단순히 우아한 말과 행동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교양 있는 사람은 무언가 우월한 사람, 교양 없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촌티 나고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주류를 이룬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은 독일어로 ‘Bildung’이라고 쓴다. 이는 영어의 ‘build’와 같은 의미이다. 무언가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칸트, 헤겔, 괴테 등 독일의 관념론적 이상주의에서 시작됐다. 당시 유럽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낙후돼 있던 독일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교양을 쌓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던 것이다.

문광훈(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는 교양을 이렇게 정의한다. “문화의 한 갈래로서 학문이 존재하고 학문 아래 인문학이 있다. 인문학의 갈래로 예술과 문학이 존재하고 그를 통해 우리는 교양을 습득한다. 즉, 교양은 문화의 핵심이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매우 오래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문화, 교양이라고 하면 배운 사람, 돈 있는 사람의 것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사실, 교양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어렵고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과 문학에 나타난 문제를 여기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해결하려 하는 노력인 것이다.
문 교수는 “교양은 개인의 자기실현이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라며 이는 “자기 확대”라고 주장한다.

또한 “자기 확대는 자기귀환으로 돌아오고, 이 순환 사이에서 긴장적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채워간다면, 사회 역시 충실한 ‘교양 있는’ 사회가 된다. 이는 곧 개인적 실존과 역사적, 정치적 문제의 일치, 삶과 학문의 일치를 뜻한다.

한편, 김우창 본교 명예 교수는 헤겔의 말을 인용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교양이란 ‘보편성으로의 고양’이다. 이는 보편성 속에서 자기 변신을 이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모든 사람이 존중하는 사회적 보편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 양식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곧 교양”이라며 “교양 없는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교양을 쌓고 실현할 수 있는가?

김 교수는 “교양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교양서적을 읽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교양서적이란,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사람이 주인공이 돼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통해 방황을 겪은 후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글을 말한다. 그 글을 통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나의 역할에 대한 고전적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김 교수는 “교양이란 자기 혼자 연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여러 사람의 예술 작품을 접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며, 학교는 학생들이 작품 속에서 그것을 올바르게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 교수 역시 많은 고전 작품을 보고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을 배울 때, 율격이나 구조를 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우리가 할 일은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잘 몰라도 자꾸 보고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 대신 신경 써서 듣고 보는 노력은 필요하다. 예술의 언어는 결코 감동을 강제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서 재미와, 자신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무언가, 삶에 대한 메타포를 찾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또 문 교수는 자율적 개인을 강조한다. 혼자 있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어야만 조용히 생각할 수 있고, 교양을 쌓을 여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교양에 대한 논의는 훨씬 더 깊고 심층적으로 다뤄져야 한다. 교양은 인문학, 나아가 우리 문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라는 문 교수의 말처럼, 진정한 교양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우리 사회가 진정 ‘교양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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