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아우얼바하(김우창 역)의 <미메시스>는  <서구문학에 나타난 현실묘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리얼리즘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주로 문체(style)의 형식과 개념을 차용해 거기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인문학적이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다는 관점은 온당한 생각이면서 관점에 따라서는 또 다른 논점을 안고 있는 명제이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며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는가 일 것이다. 그 구체적인 독서의 사례를 이만큼 선명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여준 책은 일찍이 없었다.

저자 아우얼바하는 한 작가, 한 작품, 한 구절에까지도 얼마나 많은 개인적 문화적 사회적 요인이 개입돼 있는가를 텍스트의 언어적 문맥과 사회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결합해 보여준다. 무심코 그리고 관습적으로 지나쳤던 대수롭지 않은 문장이나 어절 하나하나, 단어의 배치나 묘사의 정도에 따라 변하는 풍속과 사상, 이러한 스타일의 변화와 차이에서 오는 작품의 시대적 의미와 사회의식을 저자는 문체를 통해 ‘읽어’낸다. 치밀한 독서 내지는 꼼꼼히 읽기가 어떻게 한 시대의 역사와 정신의 습관을 추적 가능하게 해 주는가를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에리히 아우얼바하는 1892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처음 하이델베르크에서 법률공부를 했으나 1차대전에 종군한 뒤 예술사와 언어학을 공부했고 1921년에 로만스어로 학위를 받았다. 이어 말부르크대학에서 로만스어문학을 가르쳤고, 나치 정권의 유태인 박해에 따라 터어키의 이스탄불로 가서 터어키국립대학에서 11년간을 가르쳤다.

<미메시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고 하는데, 도서와 자료의 부족이 오히려 이 대작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참고도서의 부족은 그에게 원전의 치밀하고 반복적인 독서를 강요했고, 그 결과 자질구레한 실증적 자료에 구애받지 않는 통찰의 책을 내놓게 된 것이다.
원전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20개의 장으로 구성하였고, 오디세우스와 성서의 대조적 고찰에서 시작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론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거의 3000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이태리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의 7개국어의 원문을 다루었으며 서사시 역사 로망스 극 자서전 에세이 소설 등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열악한 연구 환경 때문에, 혹은 참고도서의 부족으로 인해 주로 작품의 원전에만 매달린 독서의 방법 때문에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도대체 원전 이외의 다른 참고도서나 자료가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주면서, 하나의 텍스트가 얼마나 많은 사회사적 시대적 컨텍스트를 담고 있는가를 아울러 잘 보여준 사례이다.

역사와 사회와 미적인 가치,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책은 한마디로 문학과 사회와의 상관성의 깊이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대학원시절 <미메시스>를 읽으면서 나는 진한 감동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어떤 문학작품에 감동하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그것은 읽어내는 방식에 감동하는 특이한 체험 때문이었다.

<미메시스>는 따라서 우리에게 기왕의 독서습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는 계기를 줄 것이다. 가령 <혈의누>, <은세계>, <치악산>같은 개화기소설에서의 문체의 구체적인 정황에서 혹은 염상섭의 문체와 묘사에서 우리는 당장 인물들의 심리와 사회적 조건의 의미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텍스트 자체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자질구레한 주변적 사실과 사료들에 매달렸던 기왕의 방법론보다는 언어의 관습과 스타일상의 특징에서 사회 역사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더욱 유의미해 질 것이다.

<미메시스>는 어떤 형태로든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대한 소중한 사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반영과 굴절의 정도를 측정하는 기술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문학을 연구하고 창작하려는 모든 이들이 읽어야 할, 텍스트에 접근하는 태도와 방법에 대한 깊은 통찰과 반성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서종택(인문대 교수, 현대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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