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란 말과 접할 때면 내 머릿속에는 어김없이 도스또예프스끼가 떠오른다. 내가 꼭 러시아 문학을 전공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들, 특히 최후의 대작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오락이 예술로 둔갑하고 냉소가 지성으로 받아들여지고 경제의 원칙이 문화란 이름으로 판을 치는 이 시대의 속악함에 우울해질 때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일단 재미있다. 등장인물들은 2세기 전에 씌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돈과 살인과 치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줄거리는 대문호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통속적이다.

음탕하고 교활한 노인 까라마조프와 그의 큰아들 드미뜨리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질투와 증오 속에서 반목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살해되고 그가 숨겨두었던 거액의 돈이 사라지자 아들은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된다. 물증과 심증 모두가 아들이 범인임을 지목해 주는 상황에서 그의 유죄 여부를 둘러싼 검사 측과 변호인 측이 벌이는 공방전은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 뺨치게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천재작가의 역량은 삼류 주간지의 기삿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소재를 인간에 대한 심오한 성찰로 바꿔놓는다. 치정 살인의 이면에서는 선과 악, 신과 인간, 자유와 행복, 죄와 수난과 구원의 문제들이 독자에게 고통스러운 사색과 고도의 지적 해석을 요구하며 소용돌이치고 이로부터 서서히 부상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저자의 확고한 신념이다.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보다도 양심의 자유, 판단과 선택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대가로 제공되는 보상은 아무리 달콤한 것일지라도 반(反)휴머니즘으로 귀착할 수밖에 없다. 보통사람에게 자유란 너무도 고통스러운 짐이므로 자유 대신 ‘기적, 신비, 권위’로써 풍요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채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둘째아들 이반은 얼핏 보기에 고결한 인류애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그의 논리가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조롱이다.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키면 만인의 평등과 행복을 약속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균등한 숫자로 축소시키는 모든 유형의 사이비 메시아니즘, 획일화를 일치와 단결이라 호도하는 모든 유형의 전체주의로 이어진다. 이반의 논리가 가지고 있는 위험은 그것이 너무도 그럴듯하게, 너무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데 있으며 사실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그의 매끄러운 수사를 반박할 만큼 강력한 논리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스또예프스끼는 최종적인 해답 대신 거룩한 장로 조시마의 생애와 설교, 셋째아들 알료샤의 황홀한 비전, 드미뜨리의 수난을 차례로 제시함으로써 ‘영혼의 자유’에 관한 진지한 사색으로 독자를 유도한다. 자유냐 행복이냐, 이에 관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존엄한 것이다.

쉽고 빠른 것만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세상이다. 선악의 잣대도, 가치의 기준도 흔들리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기에 인간을 정확하게 읽어내고 인간 실존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도스또예프스끼는 더욱 절실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눈과 손가락만 제대로 기능하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무한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저 고마운 인터넷은 당분간 잊어버리자. 손자국과 밑줄과 메모와 눈물자국을 남겨가며 천천히 1700쪽짜리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읽자. ‘지식인’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때다.

석영중(문과대 교수, 노어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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