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얼마 남지 않은 2002 피파 월드컵에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다. 우리나라가 공동 개최국이라는 사실을 마치 하늘이 준 최고의 기회인양 정치가도 노동자도 할말 있어도 꾹 참고 축구 하나에 일치단결하자고 한다. 거기에 23명의 선수와 감독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죽음을 무릅쓰고 몸으로 뛰는 전쟁터의 전사들처럼 선수들의 의지 또한 높다.


만에 하나 예선 탈락일 경우 쏟아지는 비난에 외국인 감독과 선수들은 어떻게 견디어 낼지 괜한 걱정이 들 정도다. 하지만 기분 좋은 상상을 말리고 싶진 않다. 그 상상의 가운데에는 매번 푸른 잔디 위에서 날렵한 움직임으로 우리의 시선을 채우는 선수들의 ‘몸’이 존재한다.
 
꿈틀대는 허벅지 근육, 땀으로 범벅된 얼굴, 숨겨진 각종 보호장비 등은 정상인의 일반적 몸의 수준을 능가한다. 축구장에 선수의 몸은 그 자체가 일종의 전쟁터로 연상되기에 충분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보여진다. 물론 컴퓨터 축구게임의 그래픽 기술은 아직 그런 박진감까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도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사이버 컬쳐를 통해 가짜 혹은 가상의 신체가 등장하면서 살과 뼈로 이루어진 우리의 ‘진짜’ 신체와 비교해볼 때 어느 것이 진짜이고 더 중요한 건지 혼동을 불러일으킬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굳이 사이버 얘기까지 꺼내지 않더라도, 몸은 옛날부터 전쟁터였다.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의 작품 속에 선언적으로 들어 있는 ‘너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is a attleground)’라는 문구는 그래서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만약 중세에 이런 말이 나왔다면 우리는 육체를 무지막지하게 고문하고 강간하는 물리적 전쟁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문구가 새삼스럽게 거론되는 것은, 고도의 감각화된 기술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전쟁’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총을 쏘고 고문을 가하는 폭력적인 전쟁일 수도 있고, 포르노그래피를 규제하듯 이념을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고 회유하고 설득하는 이데올로기 전쟁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외모·옷·화장 등 감각적인 장치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고, 나아가 도취에 빠뜨림으로써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부드러운 전쟁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여성의 고용 평등 쟁취와 같은 좀 더 현실적인 이슈들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전쟁일 수도 있다.

아마 바바라 크루거가 말하는 전쟁은 위에 열거한 전쟁을 모두 일컫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몸이라는 이슈가 그만큼 폭넓은 공간적 자장(field)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연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조차 인공화된 상황,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인공성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우리의 신체는 몸의 정상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숨쉬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노동의 공간, 놀이의 공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임산(본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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