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불이여, ‘열반, 열반’ 하는데, 열반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백장암 주지인 원관스님에 따르면 “수행자들이 수행하는 곳을 의미하는 ‘가람(伽藍)’은 그 자체가 불교적 소우주로 열반에 이르는 길”에 해당한다. 이는 만다라(mandala)의 세계로 비유되며, ‘본질, 중심, 골수’를 뜻하는 manda와 ‘소유, 성취’를 의미하는 la가 합쳐진 만다라는 결국 ‘본질의 성취’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질이란 부처의 깨달음을 의미하며 이에 대해 우리의 사찰 구조 역시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점층적인 앎의 질서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은 일주문이다. 일직선의 기둥위에 맞배지붕을 한 독특한 양식은 一心(일심) 사상을 나타낸다. 이는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일주문을 지나 다음으로 만나는 문이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다. ‘눈썹 하나만 보더라도 선운사 북방은 완연히 웃음진 주름의 노안에 어질고 / 쌍계사 북방은 푸른 얼굴에 쪽빛 무명실 타래를 굼시르르 꼬아붙인 눈썹’이라며 작가 최명희가 <혼불>에서 그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으로 유명한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는 역할을 한다.

원래 의미와는 좀 다르지만 영화제목으로 쓰여 눈길을 끌었던 ‘色卽是空(색즉시공)’과 ‘空卽是色(공즉시색)’은 ‘모든 것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는 부처의 말씀을 담고 있다. 이 사상이 바탕이 된 것이 바로 해탈문, 곧 不二門(불이문)이다.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門’을 넘어 가람의 안쪽에 들어가면 법당이 있다. 김상엽(영산대 디자인학부) 겸임교수에 의하면 “산만하게 보이는 법당의 배치에도 질서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을 뜻하는 법당을 보면 상대적으로 앞쪽의 건물은 급이 낮은 보살 등의 신을 모시고 있으며 뒤로 갈수록 위력과 권능이 높은 부처와 보살을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위치에는 그 절과 종파에서 모시는 부처가 있는 본전이 세워지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해간다.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입멸했다 전해지는 부처의 유골은 여덟 부족에게 분배됐고 이들로부터 불교 최초의 탑이 만들어졌다. 탑은 원래 석가모니 열반 후 나온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영원한 진리를 상징하고 있다.

한편 사찰의 건축물에는 종, 북, 목어 등이 걸려있는데 이마저도 불교적 상징의 범위에서 자유롭지 않다.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의 비문에는 ‘가설을 세워 오묘한 이치를 보게 하듯이 신종을 걸어 부처의 음성을 깨닫게 하노라’ 고 새겨져 있어 종의 의미가 상세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종은 부처의 말씀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을 구제한다는 뜻을 내포하며 북은 날짐승을, 목어는 비늘 달린 물고기를 구원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사찰 건축물 내외에 장식된 용은 화재에 취약한 절의 특성상 火魔(화마)로부터 보호받기를 바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이제, 무심히 지나쳤던 사찰이 이렇게 불교적 소우주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 다시 찾은 절 앞에서 우리는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松雨時復滴, 寺門淸且凉.(솔가지에 비 내리고 또다시 쌓여, 寺門앞은 맑고 시원하여라)” 정각스님이 말했듯 절의 입구에서 마주친 적막감, 그 속의 탄생과 질서의 신비가 숨어든 시원적 우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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