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 10일 밤, 6월 항쟁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면서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전국 20개 도시에서 총 3831명이 연행됐지만 경찰은 함부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처럼 교회는 국가 권력이 엄존하는 오늘날에도 교회공간의 신성성, 자율성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회 건축의 핵심은 건물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건축은 그 자체로서 성서의 이야기와 그 상징성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교 초기 사도시대(使徒時代)에는 예배를 위한 특정한 형식의 건물은 없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적당한 개인 집을 신도 모임에 이용했다고 한다. 명동성당에 걸린 ‘명례방 집회화’를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도 김범우의 집에서 시작됐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도의 수가 늘고 그리스도교가 많은 지역에 전파되면서 개인의 집과는 별개로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회당을 갖게 됐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회의 유적은 미미하다. 이은석(경희대 건축공학부)교수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지방은 초기교회가 유교회당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 국교 인정 이후의 교회는 로마신전이 그 원형이다”고 한다. 교회건축은 건축양식 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식·비잔틴식·로마네스크식·고딕식·르네상스식·근대식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근대건축이 간접적인 서구화의 메카니즘을 갖는데 비해, 기독교 건축은 선교사들에 의해 직접적 수용이 이뤄졌다. 구교와 신교의 두 갈래로 선교가 이뤄지며 교회 건축은 부분적으로 조선 건축과 동질감을 갖기도 했으나, 대부분이 고딕 이후의 양식주의를 전형으로 취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교회 건축은 전문 건축가 대신에 선교 성직자들에 의해 지어져 극히 한정된 재료와 기법으로 한계를 나타내, 고딕 양식이 초기 한국교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명동성당이 그 대표적인 건물이다. 먼저 미사가 행해지는 제대(祭臺)는 교회의 중심이다. 이는 히브리어의 ‘제사의 장소’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초기 교회 때, 순교자의 무덤위에 단을 세우고 의식을 치르던 관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데살로니카는 <시메온>에서 ‘제대 없이는 그리스도를 언급할 수 없다’고 했다. 또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의 제대는 주님의 식탁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제대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이뤄지는 중심점으로 전례 거행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명동성당에는 베르뇌 제4대 조선교구장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무덤이 교회 지하에 있다. 이는 교리를 삶으로써 가장 잘 발현한 순교자의 몸을 교회 건물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회 곳곳에 있는 스테인글라스화(유리화)는 교회의 미적 기능을 위한 것으로 성서의 주요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새겨져 있다. 故 이연호 장신대 교수가 ‘건축’에 기고한 ‘신앙으로 본 빛과 건축’에 따르면 스테인글라스가 발전돼 빛을 이용한 성서적 진리 전달의 기능까지 했다고 한다. 명동성당 중앙의 돌출머리 유리화는 성모 마리아의 잉태와 15신비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좌측 유리화는 예수 탄생과 사망을 나타내고 우측 유리화는 예수와 12사도를 나타낸다.

교회의 종탑은 바로크시대 초기까지 지어진 교회 건축물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건물 꼭대기에 세워진 것과 교회 옆에 독립해 세워진 것이 있다. 종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고 교회의 권위를 상징했다. 높이 달린 종과 고딕적 수직성은 기독교의 영광을 표현하고자 한다.

다양한 종파에 따라 교회 건축형태도 다르다. 하지만 결국 교회를 성서적 이미지로 지으려는 욕망은 거듭된다. 이는 모든 교회건축이 성서의 교리를 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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