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육사와 그의 친구들. 1938년 신석초 와 부여를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올해는 육사 선생의 탄생 백주년이다. 1904년 음력 4월 4일 아버지 아은공 가호와 어머니 허씨에게서 안동군 도산면 원촌에서 6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14세 손으로 조부 치헌공 중직에게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백학학원, 일본대학, 중국 북경대학에서 청강했고 중산대학에 학적을 두었다.

1925년 백형 원기와 동생 원인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군정서 의정부 의열단에 입단해서 광복 운동을 시작했다. 1927년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 연루돼 3형제가 2년 7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이때 수인 번호가 264번 이었다. 그때, 여기서 음을 따서 육사(陸史)라고 했다. 또 활(活)이라는 이름을 자작해서 문단에서 논설을 발표할 때 쓰기도 했다.

1930년에 대구 격문사건에 동생 원인과 함께 피검돼 6개월간 구류됐다. 1932년 중국의 봉천, 북경, 천진 등에 머물다가 김원봉이 남경에서 개교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제1기생으로 입학, 수료했다.

육사의 광복운동은 중국의 계열에 속한다. 그는 중국을 자주 들락거렸다 . 그곳에서 중국의 지도자요 사상가인 양행불(楊杏佛)과 노신(魯迅)을 만났다. <노신 추도문>을 읽어보면 그가 특히 노신문학에 심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노신을 흠모하고 노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것 같다.

육사의 광복 운동은 어떤 사건에 있어서 주동자가 된 것은 없다. 다만, 그 당시 청년동맹과 함께 진보 성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사상운동이다. 이 사상 운동은 그의 시문학에도 나타나있다.

육사의 시문학 활동은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첫 번째 작품 ‘말(馬)’을 발표했고, 1935년 ‘춘수삼제’와 ‘황혼’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1937년 윤곤강 , 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고, 이 무렵 ‘청포도’를 비롯해 ‘교목’, ‘절정’ 등의 작품이 많이 나왔다.

이육사의 문학 활동은 10년 동안 한시가 3편, 시가 36편, 수필이 5편, 평문이 17편, 소설 1편, 번역은 노신의 ‘고향(故鄕)’이 있다. 또 ‘중국 문학사’를 연재하다가 그만두었던 적도 있다.

인간은 지향적인 욕구를 가진다. 그 지향적 욕구는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육사가 살았던 시대는 식민자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이는 비극적 현실 인식을 낳게 된다. 비극적 현실인식은 현실에서 도피해 만족스러웠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보이는 과거 지향의 시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미래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는 미래 지향의 시로도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지향의 시는 감상적, 낭만적, 현실 도피적 성향이 강하고, 현재 지향의 시에서는 강한 현실대응 의지가 나타나며 미래 지향의 시에서는 시간을 초월해 영원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의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육사의 시에서도 이 모든 종류의 시가 보이지만, 육사의 과거 지향 시는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낭만적 좌절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 의지가 표명되는 경우가 많다. 지면 관계로 시를 분석하면서 논술할 수는 없거니와 육사의 시는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실에 대한 강한 대결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육사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현실을 살아간 사람이다. 그 6형제가 모두 남보다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다. 이런 그를 ‘저항 시인’으로 묶는 것은 오히려 그의 삶의 공간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육사문학은 시인으로서는 시작 편수가 적다. 시사평론은 ‘자연과학과 유물 변증법’을 비롯해 주로 중국 문제에 관한 논평이 7편이다. 평론의 필명은 이활(李活)로 했다. 사실 이원록이라는 본명은 일경들의 조서에 쓰였을 뿐, 자신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본인이 지은 ‘활’이라는 이름을 쓰거나 시고(詩稿)에는 ‘이육사’란 필명을 썼다. 그의 시사평론은 주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흐름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민족적 사회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육사의 사상성을 엿볼 수 있다.

육사는 시와 함께 미래지향의 선각적 노력 끝에 1944년 1월 16일 북경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그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과 1983년 문화훈장 금관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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