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정구부의 창설과 대외적 체육활동으로 시작된 보성전문학교(이하 보전) 운동부들은 근대 초 비조직적이고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한국 스포츠계의 초석이 됐다. 일제시대 탄압에 맞서 운동경기를 통해 민족의 한을 푸는 레지스탕스적인 모습을 보이며 이후 체육활동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앞장섰다.

1922년에 보전에는 축구부가 창설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이 축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 단체와의 축구통솔문제에서 대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전 축구부는 근대축구의 발전과 선수양성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24년 10월 ‘제5회 전조선축구대회’에 처음 출전한 축구부는 우수한 선수를 배출해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 그 명성을 알렸다. 식민지 시절, 축구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저항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민족적인 스포츠였다. 이러한 축구활동의 중심에 보전 축구부가 있었다.

19세기말, 미국에서 실내경기로 시작된 농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07년의 일이다. 이것이 1928년 국내에서 전문부로는 최초로 농구부로 조직된다. 보전의 농구부는 연희전문학교(이하 연전)보다 한해 늦은 1931년에 선수들을 스카웃하며 우수선수 규합에 힘쓴다. 이후 이 시기에는 농구부가 제1의 황금기를 맞는다. 5월초 ‘일반 구락부 리그전’을 우승하고 이미 27일부터는 조선체육회와 YMCA 공동주최의 ‘제1회 전조선 농구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해 우승했다. 1931년부터 1934년 당시 황금기는 스포츠를 통해 민족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만큼 일제의 압력도 심해 감독 및 선수진들이 고문을 겪기도 했다. 1938년부터 1940년에 이르는 3년간 제2의 황금기에는 ‘일본대학전문학교 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을 차지하는 등 일본농구계를 제압하기도 했다.

럭비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보전에서는 1929년 5월 신입생 이종구교우가 일본농대에서 럭비부원으로 있다가 전교해 온 후 창설했다. 이 교우는 보전럭비부의 초대 주장과 코치를 겸하며 초기 럭비부의 육성 · 발전에 헌신적 노력을 다했다. 창설 초 럭비는 모교생의 기상에 맞고 일본인들과 육탄전을 감행할 수 있는 점에 끌려 많은 부원들이 모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창설 1년 만에 국내의 일본 각 팀을 거의 제압했다. 당시 럭비는 운동 특성상 격렬한 몸싸움을 할 수 있어 나라 잃은 젊은이의 울분을 삭힐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래서 간혹 경기에서 난투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빙구가 시작된 것은 1930년대이다. 1937년 보전에서도 아이스하키팀을 발족했다. 이는 1928년 성균관대, 1931년 연전에서 빙구단을 조직한 것보다 늦은 시기에 발족한 것이다. 때문에 다른 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수층이 두텁지 못했다. 보전 아이스하키팀은 다른 학교와는 달리 스카웃 하나 없이, 보전의 다른 운동부와는 달리 지원비도 없이 순수 학생들만의 힘과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1940년도부터는 비록 우승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지만 서서히 강한 팀으로 변모해 좋은 기량을 펼쳤다.

이렇듯 보전운동부는 일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의 통로이자 해방의 창구로서 현재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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