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한 풍경 속에 뛰어든 낯선 이방인, 새로운 이름을 가지다- 
태국 북부의 치앙라이와 치앙마이 사이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인 메슈에이에 있는 가나안 훈련원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생활을 한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6개월 동안의 봉사활동이 예정돼 있는 가운데, 시간의 화살은 과녁을 향해 이미 6분의1만큼이나 움직인 것이다. 나는 이 곳에서 고산족 아이들의 한글 교육과 영어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 가나안 훈련원은 태국 북부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살고 있는 고산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바탕으로 한 보건 위생 사업과 그 곳 아이들을 훈련원으로 데리고 와서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관이다. 현재 훈련원 내부에는 아카(Aka)족과 라후(Lahu)족 등을 비롯해 총 5곳의 산족 마을에서 온 아이들이 기숙 생활을 하며 태국의 국립학교를 다니는 중이다. 이들은 학교를 다닌다고 해도, 정규교육과정을 제 때에 받은 아이들이 아니라 늦깎이로 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소위 ‘문명’ 이라는 것과는 떨어져 산 속에서의 생활을 하며 어릴 때부터 일상적으로 ‘노동’ 이라는 것에 익숙해 있었던 탓인지, 아이들은 책 속에 있는 지식은 부족하다 할지라도 자연 속에서 생존해가는 능력은 그 나이 또래의 어느 아이들보다 탁월한 것 같았다. 때론 어린아이들답지 않은 강한 생활력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 때가 더욱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밤에 아이들이 공부를 할 때 굵게 옹이진 손가락으로 연필을 쥐고 글씨를 또각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은 한층 더 깊은 파장을 만들어낸다.

그 손들은 무엇이 이 아이들이 일찍부터 생존능력을 키워나가게끔 만들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을 그득히 담고 불평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지곤 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이 혹 내가 지금까지 성장한 과정만을 기준삼아 던지는 편견에 찬 물음표는 아닌가 생각하며 물음표의 고리를 하나 더 이어나간다.

이렇듯 하루하루의 생활이 물음표의 연속이었던 한 달 동안 내 머리에 그 모양도 유쾌한 ‘느낌표’ 가 찍히는 일도 하나 있었다. 그건 아이들이 나에게 애칭을 만들어 준 일이다. 낯선 한국 땅에서 건너온 이방인에게 아이들은 ‘웬’ 이라는 애칭을 만들어 주었다. ‘웬’ 은 태국어로 안경을 의미하는 단어 ‘웬따’를 짧게 줄여 말한 것인데 아이들이 나를 부를 때는 언니나 오빠와 같은 손윗 사람을 부르는 호칭인 ‘피’를 붙여서 ‘피웬’ 이라고 부르곤 한다.
아이들의 입 속에서 내 이름이 불리울 때마다, 나는 대상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 그 존재를 명징하게 인정해주고 인식해주는 행위가 있을까 싶어 마음이 새삼 흐뭇해지곤 한다.
그 이름 하나가 서로에게 이방인인 산족 아이들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친밀함의 은유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새로운 이름을 얻고, 새로운 일과를 부여받고, 새로운 땅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금, 나는 태국에서 6개월간의 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쏘아당긴 시간의 화살을 다시 거슬러 생각해본다. 새로운 시간의 화살을 쏘아당기며 태국 치앙라이행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 나는 산족 아이들 속에 내가 서 있는 풍경이 어색하지 않고 무던히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 있기를 바랬다. 과연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는 날, 나는 6개월간의 시간을 어떻게 다시 반추하게 될까?

한 달이 지난 지금, 여전한 물음과 이 곳 생활에서의 설레임을 한 움큼 쥔 채 새로운 달을 맞이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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