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레마을은 유정의 고향이자 유정의 문학작품을 낳은 어머니와 같은 대지이다. 실레마을에 들어서니 이 마을을 중심으로 해발 652m의 금병산이 마치 병풍처럼 평야를 두른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내가 그리는 신록향 designtimesp=11989>에서 유정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가면 내닫는 조그만 마을이다. 앞 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떡시루 같다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김유정 문학촌’의 안내에 따르면 “김유정의 소설 대부분이 이 곳에서 구상됐고 소재가 실제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실레마을에 작품 <봄?봄 designtimesp=11991>의 배참봉 댁 마름으로 나오는 ‘김봉필’의 모델인 욕필이 영감의 집이 있다.

김유정은 1908년 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에서 유정은 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유정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유정은 스스로 “내가 말하는 ‘그리움’ 이란 모두 ‘어머니에 대한 환상’ 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과 기자가 본 마을은 분명 같은 공간이면서 다른 공간이다. 기자가 찾아간 마을은 그저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그에게는 분명 어머님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이 사무친 공간이었을 것이다. 실레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그는 그의 어머니를 닮은 박록주에게 2년 동안 구애를 한다. 소설 <두꺼비 designtimesp=11993>에 그의 심정은 한 치의 여과도 없이 드러난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깃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것두 서루 눈이 맞어서 달 떳다면이야 누가 뭐랴마는 저쪽에서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녀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열렬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닮은 여인에게 상처를 입은 그는 실연의 공간인 서울에서 다시 어머니의 공간인 실레마을로 돌아온다.

마을 너머로 팔미천이 굽이 흐르는 곳을 가보니 유정이 고향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주막 터가 있었다. 그는 마치 어린시절 안겼던 어머니의 품 같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형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가산은 탕진돼 있었다. 그때 그는 주막에서 들병이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작품에서 유정이 보여준 공간인식에 있어서 큰 특징은 단순한 내면의식을 외부공간화해 외부세계로 관심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의 세계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갈등을 일으키는 외부세계로 열려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유정은 수많은 민초들이 어울려 웃고 울며 싸우는 이 주막을 매일 찾았나 보다.

그가 바라 본 고향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 그런데 작품 속 공간은 대부분 부정적인 공간이 지배적이다. 유정은 ‘자아동일적 공간’을 설정하지 않고 도시적 공간을 지향했다. 자아동일적 공간은 자연적 공간으로서 도시적 공간과 대비되는데 도시적 공간이란 도시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와 갈등이 벌어지는 공간을 말한다. 김중하(부산대 국문과)교수에 따르면 공간에 대한 태도는 세계 인식의 태도이며, 공간의 설정양상이나 변이양상 에서 작가의식의 궤적을 엿볼 수 있으므로 유정의 공간인식에서 그의 세계인식을 가늠할 수 있다.

그의 자취를 더듬으며 실레마을을 감싸는 금병산에 올라가 봤다. 그 산자락에는 일명 ‘금따는 콩밭길’이 있었다. 그 길을 걷던 중 문득 유정의 <금따는 콩밭 designtimesp=11997>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땅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르께하다. 밤과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겉으로 황토 장벽으로, 앞뒤 좌우가 콕막힌 좁직한 구덩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부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여기서도 유정의 부정적 공간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작중인물이 부정적 공간을 벗어나고자 선택한 방법 또한 부정적인 방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고르만(Lucien Goldmann)은 “타락한 사회는 타락한 방식으로 진정한 가치를 표현한다”고 했다. ‘금따는 콩밭길’에서 이어진 ‘만무방 길’을 따라 내려가 보니 그 너머로 소설 <만무방 designtimesp=11998>에서 응칠이 화투를 치던 노름터가 있다. 노름을 하는 응칠의 모습도 타락이라 볼 수 있을까. 응칠의 동생 응오는 소작료와 빚에 시달리는 부정적 현실 속에서 자기 논의 벼 훔치기 같은 전혀 희망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는 방법을 택한다.

김수남 (조선대 문예창작학과)교수는 “김유정 작품속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비판에서 비롯된 정통적 리얼리즘과 달리 낭만주의적 성향의 따뜻한 비판을 담은 리얼리즘”이라고 한다. 분명 유정의 작품 속에 리얼리즘 요소는 있지만 김윤식(서울대 국문과)교수의 해석처럼 ‘김유정은 1930년대 농촌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작갗로서 평가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김유정의 숨결이 깃든 많은 장소들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김유정은 작품의 소재를 얻는데 분명 고향의 큰 축복을 받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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