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자살 소식을 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내년이면 벌써 십년이다. 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들뢰즈의 저작들은 그의 죽음과 정반대로 나날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갔다. 들뢰즈는 평생 매우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다루었는데, 어느 분야를 통해서나 일관되게 몰두했던 바가 있다. 바로 우리의 ‘사유’와 ‘욕망’을 암암리에 억압하는 장치들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사유’에서의 억압이란 무엇인가? 고전 철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를 통해, 철학사의 빛나는 개념적 유산들을 상속받은 후,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가 자기 사상의 집대성으로 내놓은 걸작이 <차이와 반복>(1968)이다. 이 책은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요약된다. 가령 두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두 개별자가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과라는 일반명사를 양자 모두에 공통적으로 적용한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가장 원형적이고 모범적인 사과, 즉 이데아로서의 사과가 있으며, 현실적인 사과들은 그 모범적 원형을 분유(分有)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실의 개별자들은 이데아의 성격을 얼마나 많이 분유받았는가에 따라, ‘보다 우월한 것’과 ‘보다 열등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문명 안에 도사린 모든 폭력의 배후에는 바로 ‘원형에 근접한 우월한 것’과 ‘원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열등한 것’을 가르는 이런 차별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령 인간의 원형에 근접하는 백인 남자와 그 원형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을 가르는 인종적 차별, 우월한 서양과 열등한 동양을 가르는 문화적 차별…….

이런 전통 철학의 사고 방식과 달리, 모든 개별자들에게 수직적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이데아적 원형은 없으며, 개별자들 사이엔 오직 수평적인 ‘차이’만이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아울러 원형적인 것, 모범적인 것이 없으므로, 열등한 것들은 보다 원형에 가까운 우월한 것의 지위까지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강박적인 ‘발전 모델’도 폐기된다. 열등한 것에서 보다 나은 것으로 오르는 변증법적 발전을, 수평적 차이가 창출해낸 다양성들만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반복’의 사상이 대체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 책은 다양한 것들 사이의 차이가, 우성과 열성이 아닌 평등으로서 존중받는 세계를 꿈꾸고 있다.

이렇게 서구의 사유를 짓누르고 있던 이데아론과 변증법적 발전 모델을 제거한 후 들뢰즈가 몰두한 작업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는 학문적?제도적 장치를 공격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의 결과물이 바로 젊은 세대들의 진보적 정치 운동에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넣은 <앙띠오이디푸스>(1972)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18세기에 칸트가 계몽주의의 완성자로서 수행했던 작업을 다른 형태로 수행하고 있다. ‘너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칸트는 계몽의 표어를 이렇게 제시한다. 욕망 이론에서의 계몽운동가라 할만한 들뢰즈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성을 지도하는, 이성의 후견인의 자리는 이성 자신 외에는 교회든 군주든 그 무엇도 차지할 수 없듯, 우리 욕망의 후견인 자리에는, 오이디푸스로 대변되는 어떤 형태의 억압적 권위도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즉 욕망은 결코 부성적 권위에 대한 복종과 죄의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이 중요한 까닭은, 욕망의 본성을 억압하고 변질시키는 오이디푸스가 단지 프로이트가 고안해낸 정신분석학적 개념이기 이전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특성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버지, 어머니밖에는 볼 수 없다”라는 들뢰즈의 말은, 자본주의 체제 전체가 하나의 ‘확대된 가족 무대’라는 뜻을 담고있다. 내 욕망이 아버지 아래서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아이)로서 나는 영원히 자본주의 체제(아버지) 아래에서 각종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을 겪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나아가 아버지를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 내 욕망이 감내해야하는 숙명이라면 자본주의의 빗장을 부서뜨려서는 안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내 욕망의 숙명이다. 이런 방식으로 욕망은 오이디푸스 아래서 자본주의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다.

이런 인식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왜 자본주의가 욕망의 비오이디푸스적 본성을 일깨우는 ‘욕망의 계몽’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오이디푸스적이라면, 본성상 비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은 피할 도리 없이 자본주의에 대해 혁명적이고 위협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뢰즈를 대신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그의 책들은, 수많은 영역에서 억압과 폭력의 벽을 부수는 망치로서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고 있다. 

서동욱(서강대 강사/현대프랑스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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