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체트의 쿠데타가 발발한 1973년의 칠레. 가택수색의 긴박한 상황이 연출된 가운데 그 집의 주인이었던 한 사람은 병사들에게 조용히 말한다. “이 집에서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은 하나밖에 없네.” “그게 뭡니까?" 순간 손을 권총으로 가져가는 장교에게 들려온 대답. “시(詩)라네.”

이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다. 서정의 시인, 사랑의 시인, 민중의 시인, 혁명의 시인. 모두 그를 일컫는 표현이다. 개인적 사랑의 묘사에서부터 혁명의 불꽃을 제시하기까지 네루다 시의 진폭이 큰 것은 그것이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처럼 시란 영혼을 뒤흔들던 무언가를 그만의 방식대로 표현해낸 전부였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요,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라고 했던 네루다. 전자와 후자의 전쟁에서 둘은 번갈아 승리하지만 결코 시 자체는 지지 않는다던 한 시인의 외침은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세상을 울리고 있다.

(원제: Aufenthalt auf Erden - Der chilenische Dichter Pablo Neruda wird 100)
            -출전: 베를린 신문(Berliner Zeitung) 2004년 7월 10일자 기사
            -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 오마 사벤드라 산티스(Omar Saavedra Santis) 씀
            - 김영관 번역

 시(詩)의 제왕들은 죽어서까지도 고된 삶을 살아가는가 보다. 끝자리 숫자가 5로 끝나는 당해 년도 기념일마다 가혹하리 만치 주기적으로 휴식을 방해받아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 그들이 운명을 달리한 연도가 인디언 신화 속에서 생명력을 의미하는, 이 미신의 숫자 오각형의 모서리에 닿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을 곳곳에서 경건한 분위기 속에 기억하곤 하는 것이다. 낡은 동판(銅版)이 새롭게 단장을 하게 되고, 공식적으로 화환이 바쳐지는가 하면, 학술대회가 조직되며, 그들에 대한 신중한 재평가가 이루어진다. 또한 기념 우표가 발행이 되기도 한다.

한편 추모 문집이 출판되고 또 멜랑콜리한 신문기사도 빠지지 않고 그들을 기억하기 마련이다. 곧이어, 거룩한 경의의 불꽃이 점화되면서 공식적으로 죽은 시인들에 대한 모종의 시체능욕이 거행되는 것이다. 그 어떠한 일도 허용된다. 이 세계문학의 유리진열장 속에 금빛 명성으로 못 박혀 있는 시인들은 이날 거추장스러운 갖가지 행사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후에 바쳐지는 찬사는 오직 이 위대한 시인들을 위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떠오르는 모든 추억을 죽은 그들은 감내해야 한다. 

   
  7월 12일, 나는 동향사람 파블로 네루다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는 1904년 오늘 칠레에는 겨울이 한창일 때, 추운 라틴아메리카의 빠랄(Parral)에서 네프탈리 레이스 바소알토(Neftalí Reyes Basoalto)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다. 묘하게도 칠레의 주목할만한 시인들이 많이 태어난 이 피폐한 촌락에서 네루다는 온 생을 통틀어서 정녕 다함이 없는 시적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물론 말이 없고 엄격할 대로 엄격하기만 할뿐, 시적 재능과는 무관한 아버지의 이 좁은 성(城)은 그의 어린 시절에 뼈아픈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직은 어리지만 외지에 대한 뜨거운 동경을 가지고 있던 네루다는 쓴다. “십육년 전 나는/ 어느 백색 먼지의 마을에서 태어났지, 그런데 이 마을은 지금껏 내게는 낯설기만 한데/ 그곳에 대한 추억은 조금은 천하고 앳되므로/ 우리, 방랑하는 가인(歌人)들아 나의 유년시절로 관심을 돌리자.”

  네루다는 상당히 이른 나이인 열여덟살에 - 그 자신에게는 물론 그다지 이르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 숨통을 틀어막는 듯 한 그의 고향을 등지고 광대무변한 우리 인간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위대한 행진의 첫발을 내딛는다. 물론 네루다로 말하자면 그가 굳이 일기를 쓰기 위해서나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날 필요까지는 없었으리라. 도중하차 할 수 없었던 그 길었던 여행의 종착지에 대하여, 우연한 만남과 사건, 잘못 들었던 길, 산의 정상과 절벽에 대하여, 그리고 지나치며 잊혀져가던 풍경과 그 밖의 모든 것들에 대한 가장 좋은 안내책자는 다름 아닌 그의 시들일 것이다.
누구든지 네루다가 지상에서 체류하는 동안 겪었던 삶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권하건대 네루다에 대한 수천의 평론과 논문들 중에서 공신력 있고 우수한 최신의 책자를 뒤적거리느니, 응당 그 자신의 말을 직접 경청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말해서 네루다에게 더 가까이, 그러니까 그의 작품이 지닌 좀체 흔하지 않은 당혹스러우리 만치 경이로운 들판에 이르기 위해 그가 직접 제작한 시의 지형도로 눈길을 돌리는 것 보다 최선은 없다는 말이다.

  이미 스무살에 네루다는 세대를 거듭해도 빛이 바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아름다운 연시를 쓴다. 오늘날까지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연인들의 손에서 떠날 날이 없는 <스무 개의 사랑 노래와 절망 속의 한 작은 읊조림>이 그것. 이 얇은 책자가 부분적으로 혹은 아예 전체가 폭넓은 대중의 사랑 속에 가감 없이 쉽게 표절의 대상이 되는 점에 관해서는 그의 작품이 스스럼 없이 책임을 져야 하리라. 사족을 붙이자면, 이 일련의 습작들 중 16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은 의심 할 나위 없이 시인 타고르의 개인창고에서 빌려와서 재생산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네루다에 대한 관심이 비단 이 연시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데, 그가 구사하는 언어의 시적 힘을 오직 풍요롭고도 다채롭게 확장하는 서정시적 에로스에서 기원한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에 관한 한 그의 정력적인 혹의심이 특별히 극복해야 했던 한계는 주제의 측면에서나 기교적인 측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가 걸어가야 했던 슬픈 숙명의 황혼녘, 길 어귀와 어귀를 지나 선천적으로 타고난 온갖 모순과 결함이 결집한 장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우리는 차마 끔찍한 진실과 대면케 되는데, 그 진실이란 바로, 그가 그 어떤 창작의 원칙을 고수한 적도 없을뿐더러, 창작 위에 군림코자 하는 학계의 권위 앞에 무릎을 끓어 본 적도 없으며, 더욱이 그를 현혹하던 갖가지 미학적 외투도 과감히 훌훌 벗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시세계는 처음부터 끝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네루다에게 그리스 신화 속의 마이더스 왕에 관한 이야기가 더는 신화 속의 이야기만은 아닐 터, 네루다가 손을 대는 찰나, 만물은 시로 화(化)하는 것이다.

  잘 알려졌듯이 네루다는 열정을 가진 건축가였을 뿐만 아니라 수집광으로서도 아마추어 이상이었다. 그의 집들조차도 자신의 진귀한 상상력에 걸맞게 건축했던 네루다 아닌가. 그 집들 중 둘은 ‘이스라(Isla)’ ‘네그라(Negra)’라는 - 이름대로라면 ‘검은’ ‘섬’인데 -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검지도 않고 섬도 아닌 한 어촌에 자리잡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발파라이조(Valparaíso)의 “라 세바스띠아나(La Sebastiana)”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지속적인 재건을 거쳐 그 특유의 좁은 계단과 거대한 창문, 그리고 이 창문을 통해 망망대해로 뻗쳐나가는  태평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건축물의 면모를 과시한다. 또한 이 건축물들의 건축술과 건축자재 및 테마는 의례 네루다 시를 닮아 있게 마련이었다.

그의 집들은 희한하기 이를 데 없는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잡동사니들은 그저 평온한 순간을 갈망하는 한 무사안일주의자의 소박한 소장품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으로, 눈물과 함께 겨울바다를 항해하던 뱃머리의 목조여성상으로부터 골동품 망원경, 온갖 종류의 방울, 지구의, 아기자기한 도자기, 싸구려 예술품, 속이 공허한 유리배, 천체 망원경, 깃발, 어느 선장의 사진, 모래시계, 비거나 가득 찬 병들, 옛날 장난감, 채집한 곤충, 조개, 고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중 모래사장에 닻과 함께 좌초해 있던 선박의 녹슨 발전기는 다만 말없이 기관차만을 몰던 아버지에 대한 그의 아련한 향수를 짐작케 한다.

  하긴 스스로는 코스모폴리탄의 시민권을 완강히 부인했지만 또 한편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던 시인이었기에 그의 삶이 그리 순탄하거나 단조로울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가 평생을 거쳐서 환영해마지 않던 기회의 순간들은 도저한 실험정신의 확장을 꾀할 수 있던 시간들이었으며, 동시에 고향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간절한 그리움의 공간이었으리라. 칠레는 이 초라한 오딧세이의 고향부두와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네루다의 시는 어찌 보면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러나 시적 긴장감을 늦추는 법 없이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에 대한 물음을 대담하게 밀어붙인다. 물론 그의 시세계가 이러한 차원에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에게 삶의 진실은 아스라한 현기증을 유발하고 또 착오가 없을 수도 없지만 이에 여념하지 않고 배우는 자의 겸손한 자세를 잃어 본적이 없는 그였다. 네루다에게 창조를 향한 전진은 절망과 좌절의 희생을 감내하고도 남을 만큼 절실한 것이었다. “오류들, 나를 항상 상대적인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리고 진리들, 나를 항상 실망스런 오류의 공간으로 유인하는, 나는 이 둘을 모두 용납할 수 없다. 또한 나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미숙한 문학에 대한 관점도 가져본 적이 없다. 곧, 늘상 사람들에 의해서 회자되고 심지어 강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리고 때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 의해 소위 ‘창작의 과정’이라고 명명되는 것이 그것이다.”

  그의 시가 원숙미를 더해가던 시기에, 그의 시적 주제는 미학적 에테르의 천체와 농후한 정치적 성향으로 가장한 지상의 공동묘지 사이를 큰 폭으로 진동한다. 한편, 그 스스로는 내면으로부터 울려오는 한 고독한 동성애자의 광포한 자기부정의 절규에 귀기울여야만 했으며, 동시에 극단적인 냉전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선전에 희생되었다는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가장 단순한 사물의 세계를 가벼운 마음으로 추구하곤 한다. 그리고 항상 그러했듯이 라틴아메리카의 온갖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신화와 이야기의 세계를 서성거리며 아픈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게다가 그는 ‘문학이 역사와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가?’ 하는 이제는 진부하고 무익하게까지 보이는 이 낡은 질문 앞에서 항구여일하게 ‘그래야 한다’고 답한다. 당시 네루다는 지식인사회의 신선한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래서 네루다의 시집 <거대한 노래>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이 그전과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네루다의 보다 네루다다운 자아는 그의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가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집 <지상에 체류하는 동안>이 이끌던 잿빛 성공의 그늘이 가셔가던 무렵 그를 훈계하던 것은 시적 미학의 정점에서 축포처럼 터져 오르는 자기소멸과도, 불모의 모래사장에서 순간 반짝이는 순수시의 촉촉함과도 거리가 멀다. 게다가 그는 그의 앞길을 확장하고자하는 욕망에 눈이 멀어서 그의 시세계를 안내하는 친절한 혹은 불필요하게 말이 많은 교사를 자청한 적도 없다. 설령 그의 목소리가 일관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일한 시가 경우에 따라서는 만화경의 세계 마냥 다채롭게 읽힌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한데, 대체로 고전적인 작품들이 가진 보편성과 영속성은 이런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네루다를 포함한 소위 이 선택받은 자들은 물론 우리의 세계에서는 갈등의 불씨와도 같은 존재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창작의 길을 둘러싼 문학의 민감한 생태계를 순식간에 초토화시킨다. 마치 이 괴물들이 모든 가능한 문학적 감정들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들이켜 버린 듯이, 혹은 모든 순수한 영감의 목초들을 깨끗이 먹어 치워 버린 듯이나. 그리고 왜 이 괴물들이 나중에는 사람들에 의해 숭앙되고, 그들의 언어가 어째서 굳건한 도그마가 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아류가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도처에 천한 모방 악세사리를 진열한 가계들이 번창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반 백년동안 네루다는 칠레 시단의 거인이었으며 넓게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지간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군림하던 시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본심은 분명히 아니었다. 네루다는 이미 일찍부터 어떠한 문학적 조류와도 거리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초상을 담은 시적 유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을 다져본 적도 없다.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방법상의 문제를 기술한다는 것은 그에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리라. 한결같이 이러한 독재자의 언어 속에서는 “정상의 왕좌에 앉지 않으면 멍텅구리지!”라는 따분한 모토는 찾아볼 길이 없다.

네루다가 이 절대적인 권력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이러한 사실을 즐겼던 것도 사실이다. 오직 획일적인 작품세계만을 고집하는 현대의 시인들이 네루다 곁에서 그의 진언을 경청하기를 원한다면 상당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리라. 또한 우리는 네루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왕관을 둘러싼 쟁탈전으로 인해 많은 칠레의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할 수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세계의 시단에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네루다는 큰 시인이었다. 그러나,…….
  네루다학(學)에서 이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 이 ‘그러나’라는 개념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 개념의 공간은 오늘날 점점 더 팽창해 가고 있다. 그래서 네루다에 관한 글들을 모두 짜깁기하면 별 어려움 없이 지구의 적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다고 어느 네루다 연구가는 서슴치 않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네루다 고유의 작품세계가 어떠한 이유에서 하필 이 ‘그러나’라고 하는 네루다 신화의 탈신비화 경향보다 덜 연구가 되는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상이한 입장차가 없을 수는 없다. 또 이러한 경향의 원인이 항상 허울좋은 해명만을 위한 것도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동일한 선상에서 명성이 으레 거느리곤 하는 질투와 적대감이라는 쌍둥이 그림자 형제가 줄기차게 발언권을 얻고 있음도 상기하자. 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후안무치한 자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발언의 공개석상에서 네루다의 도덕성을 문제삼는 설교를 일삼아 왔다. 살아 생전에 벌써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던 네루다가 아군의 진영에서 울려퍼지는 달콤한 찬양에만 귀 기울일 수는 없던 것이, 그는 또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적 진영의 나팔소리도 시시때때로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의 적들 중 일부는 같이 시를 쓰던 동료들이었다. 그들의 공격에 대해 네루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도 역시 일관된 자세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의 적들과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로 월등히 많은 친구들을 가졌었다. 프레테리꼬 가르시아 로르까, 라파엘 알베르띠, 죠르주 아마도, 루이 아라공, 파블로 피카소, 예야 이렌부르크, 나짐 히크멧, 아나 지게스, 스테판 헤르믈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볼로디아 타이틀보임, 그리고 살바도르 알렌데가 그들이다.

  늦어도 1936년 이후부터는 정치적 앙가쥬망이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활력소였다. 스페인 정부를 위해서 또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네루다는 입당을 결정한다. 물론 그의 이 탁월한 선택은 한편으로는 생산적기도 하고 또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창작의 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1945년 그는 공식적으로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는 여기서 죽는 그 순간까지 참을성 있게 충성을 다하여 일했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후회한 적도 없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오늘날 상상력이 턱없이 모자란 우리들에게조차 고전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일면이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이, 또 아우슈비츠에 대한 불온한 기억이 아물지 않던, 게다가 그 이후 지속되던 납빛의 냉전시대 상황에서 그의 행보는 당시 여러 지성인의 태도와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공산주의의 폭력이 그 모든 것을, 안이한 구질서를 문제삼는 그 모든 것을 가타부타 없이 망치질 할 때였지 않은가.

  한낱 ‘지상에서 소외된 자’에 대한 불타는 그의 연대감은 이들의 삶에 대한 폭넓은 동감과 감동에서 비롯한 것이지 단지 특정한 실존적 사회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임시방편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성향으로 인해 네루다를 스탈린의 과업 수행에 동원된 눈먼 로봇으로 또, 그의 시를 당 기관지로까지 비하하고자 하는 ‘참신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런 시도들은 그의 작품들을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하지만 네루다가 불순한 의도로 몇몇 당을 위한 찬양곡을 작곡했음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괴롭게 몸부림친다. “물론 나는 잘 알고 있다. 혁명과 혁명가도 종종 오류와 부조리에 봉착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인간에 대한 불문율은 우파에게서처럼 좌파에게도 동일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 누구도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의 이 고백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즉, 인류의 연대의식과 인간적 기품에 바탕을 둔 정의의 하얀 깃발이, 그러나 커다란 과오로 구멍 뚫린 이 깃발을 개종자가 열심히 참회기도를 하는 와중에 착용하는 흰옷과 맞바꾸겠다는 말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네루다에 대한 공격은 그저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내심 그에 대한 사무친 적대감을 버릴 수 없던 동료들이나 비평가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의 그 정의에 불타는 시학도 스스로를 1949년의 탈출과 망명을 부축이던 시대의 횡포로부터 보호할 수는 없었다. 구태의연한 민주주의 정치질서를 유지하고자 당시 이탈리아와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안보를 명목으로 네루다의 그 위험한 시들을 싸잡아 맹비난한다. FBI가 작업한 그에 대한 세부신상기록카드는 어떤 종류의 단행본 출판물보다도 훨신 두껍고 치밀하다. 좋은 친구들 가운데 치명적인 적들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은 저 악명 높은 ‘쿠바인의 편지’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네루다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단두대에 세워져 공개적으로 심판 받는 오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시낭독 순회여행 중 미국 펜클럽의 초청과 페루정부의 표창 수여는 그가 평생을 두고 용서할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철저한 조롱이었다.

  한편 네루다를 기억하는 오늘 이 시간을 위해 그의 무덤 곁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비판의 해머를 손에 쥔 채, 환호작약하며 떠벌리고 있을 어느 초라한 정신들도 잊어서는 안되리라. 그들는 외친다. “볼지어다. 고급스런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그 속이 천하고 값싼 석고상에 다름 아닌 시인 네루다를” 물론 그들에게도 이 숭고한 자아실현의 순간을 허락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는 다시 그의 시세계와 대화를 계속하자. “그의 작은 육신이 썩고 난 그 이후에, 그가 남긴 작은 침묵의 반란 그 이후에, 또 여전한 적대감의 잔잔한 흐름이 그친 그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없어라, 아무 것도 없어라, 미래의 피의 정신이 보라고, 피로써 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라.”

  투병 중이던 네루다는 1973년 9월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도 열흘을 더 살아 있어야 했다. 마지막 혼미한 정신착란의 순간에 그는 반복해서 외쳤다고 전해진다. “당신들은 모두 죽어요. 모두가 모두가 죽는다니까요.” 얼마 뒤 산티아고에 있던 그의 아름다운 집 ‘라 카스코나(La Chasocona)’ 는 용맹스런 칠레의 군인들에 의해서 깨끗이 파괴된다. 그리고 그날 이 집에서 시작된 장례행렬은 중무장한 군대의 삼엄한 경계 속에 묘지로 향했다. 그의 장례에는 수백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들 중 스웨덴 대사와 멕시코 대사만이 외부세계의 유일한 대표자였다. 장례행렬은 조금은 떨렸지만 그러나 침착하게 “인터네셔널가"를 불렀다.

이것은 이 독재정권에 대한 첫 번째 공식적인 시위였다. 피노체트 장군은 이 시인의 죽음을 위해 3일간을 국가차원의 애도일로 지정한다. 그리고 그는 네루다를 7년동안 칠레에서 파문시킨다.   물론 네루다에 대한 나의 말이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혼란스럽지 않은 어조를 유지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네루다의 작품과 오랫동안 정을 나누는 사이에 나와 네루다는 서로 거리낌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의 곁에서 나는 항상 친근감을 느껴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50년 칠레에서 <거대한 노래>가 불법인쇄 되었다. 내 아버지는 그 원본 복사본을 갖고 있다는 데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이 복사본에는 “깜빠네로 네루다(스페인어: 친구 네루다)”라는 네루다의 파란색 자필서명이 화려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이 책은 내 인생의 첫 번째 독본(讀本)이다. 내 어머니는 이 책과 함께 내게 읽기를 가르쳤다. 지나치게 과장된 주장이 되려나, 만약에 내 전생애를 걸쳐 이 독서의 시간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옥과도 같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한 유년시절로부터 24년 후, 피노체트 장군의 비밀경찰이 나의 아버지를 추적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그들은 내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기르던 암캐의 작은 오두막과 그 너무나도 비정치적인 암캐까지 빠지지 않고 수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내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마치 분을 삭이기 위한 듯이 우리의 작은 가족도서관에서 소위 반동적이라고 하는 도서들을 질질 끌어냈다. 그 가운데서 내 첫 번째 독본을 발견하고는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저며오던 슬픔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가슴 아팠던 순간도 오늘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내 첫 번째 스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임을 고백한다.

김영관 (베를린 국제학교 한국문학 담당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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