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태국 치앙라이의 가나안 훈련원에서 고산족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을 가르치다보면, 아이들의 조막만한 머리들 사이로 몇 명 어른들의 얼굴이 보이곤 한다. 수업을 훈련원의 아이들 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에게도 개방을 해 놓았기 때문인지 알음알음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찾아온 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까닭을 물어보니, 거의 모두가 한국의 공업단지에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한다. 수업을 진행하면서 소위 ‘코리안 드림’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유난히 신경이 많이 쓰였다. 그들은 저개발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서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악덕한 고용주를 만났을 경우에는 임금이 체불되거나, 상해를 당해도 산재보험의 혜택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일을 겪게 된다. 고용주들이나 한국인 근로자로부터 언어폭력은 다반사고 심지어는 물리적인 폭력도 당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한국에 있을 때 학내의 대자보를 통해서, 그리고 언론의 보도 등을 통해 그 실태를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서 걱정인지, 안쓰러움인지 모를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물론 다행히도 한글 교실에 꾸준히 오는 몇 분들은 입국 비자를 얻어 합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절차를 밝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위 ‘불법 체류자’라는 꼬리표는 뗄 수 있을지언정, 타향살이를 하며 한국에서 그들이 겪을 지난한 시간들을 생각하니 그들의 ‘코리안 드림’ 이라는 것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도 짙고 깊게 느껴졌다.
한국어 교실에 찾아오는 이들 이주 노동자 분들의 이야기를 끌러 놓다보니, 몇 주 전에 이 곳 훈련원에 잠시 머물렀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름이 ‘난다야 쪼이’ 라는 그녀는 현재 방콕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안산과 수원의 공장에서 일을 했었다는 그녀는 당시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처우 문제를 해결해주며 선교활동을 함께 펼치던 이 곳 선교사 내외분과의 인연이 생각나 감사의 마음으로 훈련원에 찾아온 것이었다.

훈련원에서 선교사 내외분 이외의 또 다른 한국인이 보이자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서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났는지, 어눌한 한국어로 나에게 줄곧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4년 동안 머물렀는데 다시 태국으로 돌아온 이유가 공장주로부터 성폭력을 당해 더 이상 한국에 발붙이는 것이 싫어 돌아왔다고 했다.
자신들의 고국에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여러 가지 수모를 감내하며 이주 노동자의 이름표를 달고 일을 하는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그녀인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공장주로부터의 성폭행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국인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이 솟아올랐다. 더불어 그녀가 알고 있는 한국어 단어 중에 듣기 거북한 비속어들이 있음을 알았을 때는 그녀가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언어폭력 속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아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며칠 동안 훈련원에 머물다가 다시 방콕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몇 달 뒤면 서류 처리가 완료돼 한국어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몇 분은 한국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과의 만남은 매체를 통해 듣기만 했던 이주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실감있게 느끼는 계기가 돼 내 마음에 복잡한 생각의 타래를 엮어 놓았다.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법적인,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해결도 물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만 바로 잡는다면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는 조금이나마 그 해결의 여지는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들을 고용한 고용주들이나, 한국 땅에서 이들의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닌, 평등한 위치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바라봐 주는 시선을 가질 때, 이들이 가진 ‘코리안 드림’은 더 이상 악몽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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