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동시에 ‘스탕달’이 되고자 했던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철학과 문학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와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의해 대표된다. 그리고 이 두 저서는 각각 그의 전,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 작가 사르트르는 주로 소설과 연극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사유 체계의 전모(全貌)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문학비평가, 문학이론가, 시나리오 작가, 정치평론가 등의 모습도 당연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사르트르의 문학 연구에 있어서 이른바 ‘그의 사상을 통한 연구 방법’이 곧잘 이용된다. 물론 그의 문학에 대해 형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연구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들도 이 방법이 갖는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사르트르의 문학을 그의 사상의 변천과 관련해 세 단계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1946년 作
문학을 통한 자기 구원(救援)! 이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이 때 구원은 문학을 통해 영생(永生)을 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사르트르는 자서전적 소설 <말>에서 자신이 문학을 기독교적 영생의 ‘대용물(ersatz)’로 생각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사유 체계에서 인간은 ‘우연성(contingence)’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신(神)의 부정’ 위에 그의 사유 체계가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존재 ―사물과 인간― 는 그냥 거기에 아무런 이유가 없이 내던져 있는 존재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이 존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의식의 주체로서 자기와 자기 아닌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이른바 실존의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 여정은 또한 그대로 ‘자유’의 여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존재이유를 찾아 자기 존재를 정당화시키려고 한다. 이 과정은 인간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구토>에서 로캉탱의 경험에 입각해 문학을 통한 구원, 즉 자기 존재의 정당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참여문학 또는 앙가쥬망 문학!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사르트르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 분야에서의 변화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으로 집약된다. <존재와 무>의 세계는 집단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이에 비해 <변증법적 이성비판>의 세계는 사회, 역사적 지평에 서있는 개인들의 세계이다. 사르트르는 이들에 의해 형성되는 공동체가 ‘폭력’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공동체는 자원의 ‘희소성’, ‘다수 인간들의 존재’ 그리고 ‘실천적-타성태(pratico-inerte)’ ―이 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실천(praxis)’을 통해 만들어낸 기계, 도구, 제도 등이 오히려 이 인간의 새로운 실천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의 작용으로 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비인간적 삶을 영위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 두 부류 ―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에 속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 곧 폭력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자신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치일 수 있다. 오히려 글쓰기가 갖는 불온성(不穩性)과 이의제기(異議提起)를 통해 작가는 폭력으로 뒤덮인 이 세계를 ‘드러내고’, ‘폭로하고’ 또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다. 글쓰기는 ‘기존(旣存)의 폭력’에 대해 대항하는 ‘대항폭력’, 보다 더 정확하게는 ‘언어적 대항폭력’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항상 한 사회의 지배세력에 ‘유해(有害)하며’, 따라서 이 세력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의 요체이다. 주로 <파리떼>, <더러운 손>, <악마와 선신(善神)>, <알토나의 유폐자들> 등과 같은 극작품들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니힐리즘!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인류의 역사는 폭력을 제외하고는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 ―절친한 친구였던 아롱(R. Aron)은 이런 주장을 펴고 있는 사르트르를 ‘폭력의 사도(使徒)’로 규정하고 있다― 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폭력이 난무하는 공동체를 다른 폭력을 통해 폭력 없는 공동체로 만들어도 이 공동체는 다시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 속에서 사르트르는 1953년경부터 문학에 이별을 고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말>의 집필 구상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1964년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해에 그는 노벨문학상 작가로 선정되었다. 물론 그는 이 상을 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사르트르는<말>에서 우선 자신이 30여년 이상 문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신경증(n,vrose)’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자신이 오랜 동안 ‘펜’을 ‘검(劍)’으로 삼고 ‘이웃의 구원’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것은 그저 ‘덤으로’ 한 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말>이 출간되었을 당시 가진 한 인터뷰에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배가 고파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구토>는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비장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른바 문학이 갖는 사회적 기능에 대한 포기 선언이다. 그 이후 사르트르에게는 니힐리즘만이 남게 된다. 폭력이 난무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모든 것을 거부하는 절망적인 몸부림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만이 남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르트르가 그의 창작의 마지막 작업으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자들>을 각색한 것은 매우 이채롭고도 흥미롭다고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사르트르의 문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문학 작품이 ‘바나나’와 같아서 즉석(卽席)에서 소비되어야 가장 ‘맛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견해이다. 그럼에도 굳이 얘기를 하자면 ―물론 사르트르의 문학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따지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글이 필요할 것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의 본령은 끝끝내 인간의 의식을 마비되고 편안한 상태로 두지 않으려는 자세에 있다고 하겠다. 필자는 이런 자세를 한 마디로 “그렇다, 하지만.(Oui, mais.)!”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지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정신! 이것이 앞으로 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사르트르의 문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변광배 ( 한국외대 대우교수·20세기 프랑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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