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은 유엔이 선언한 “국제물리의 해“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역사를 뒤흔든 중요한 논문을 네 개나 발표한지 1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고, 동시에 이러한 물리학적인 기적을 다시 이루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05년에 당시 26세였던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 중 두 편은 특수상대성이론이고 다른 두 편은 각각 광전효과와 브라운운동에 대한 이론이다. 이 중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업적은 광전효과이론으로써 양자역학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자신은 양자역학의 확률적인 특성에 회의를 품고 죽을 때까지 신뢰하지 않았음은 물리학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반인에게 광전효과이론보다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상대성이론일 것이다. 상대성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구분되는데 1905년에 발표된 논문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대한 것이다. 지금도 특수상대성이론은 인간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바꾼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6년에 발표된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장과 공간에 관한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물체의 길이, 수명 또는 질량 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값들이 어떻게 측정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즉, 똑같은 물체에 대해 이러한 양들을 측정하였다면 누구든지 같은 결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특수상대성이론은 이와 같은 물리량이 어떤 기준계에서 측정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지상에 정지해 있는 사람과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는 기차를 타고 있는 승객이 기차 안에 고정되어 있는 탁자의 길이를 각각 측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특수상대성이론은 지상에 정지해 있는 사람이 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보다 더 작은 길이를 측정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또한 기차를 타고 있는 승객이 보는 자신의 시계는 지상의 사람이 보는 승객의 시계보다 더 빠르게 진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와 같은 놀라운 예측은 모든 물리법칙이 서로 일정한 속도로 상대 운동하는 계(관성계라고 부름)에서 같은 형태로 기술된다는 가정과 빛의 속도가 모든 관성계에서 일정하다는 가정으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들은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써 물리학 역사에서 아인슈타인의 역할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들 사이의 상식에 대한 한 가지 예로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물체의 속도가 측정하는 자의 속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정지한 내가 보는 반대편 선로의 기차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보는 반대편 선로의 기차속도는 현저히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측정자와 물체가 모두 이동하고 있을 때 측정자가 보는 물체의 속도는 물체의 속도에서 측정자의 속도를 뺀 값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상식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있던 이렇게 평범한 사실은 19세기에 발표된 유명한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을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을 살펴보면 그 안에 전자기파(또는 빛)의 진행속도가 상수로 포함되어 있고 이는 빛의 속도가 측정자와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역학이론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므로 물리학계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불가능하였으리라는 점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아인슈타인의 지적 과감성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 특허국의 한 젊은이가 발표한 논문이 처음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연구결과를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은 독일의 물리학자인 플랑크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이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상대성이론에 관한 연구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적 사고를 사랑하였다. 그는 1901년 스위스의 취리히 공과대학에 입학할 당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독일의 국적을 포기하고 스위스의 국적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반전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평화주의 노선을 추구하였다.

 또한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나치정권 하의 독일을 탈출하는 수많은 망명자들을 돕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하여 독일 등을 제압하도록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의 피해를 실감한 직후 핵폭탄의 위험을 알리고 반핵운동을 전개하며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미국의 위선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다.

 이로 인하여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행보를 위대한 물리학자의 순진한 이상주의로 비난하는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그의 학문적인 업적 및 정치적 행동의 바닥에 흐르는 일관성을 본다면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평화와 자유정신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20세기는 물리학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시기였다. 그 바탕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의 모든 과학기술은 물리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국제물리의 해”를 기회로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폭되고 지금까지의 발전이 금세기에도 계속 이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홍병식 (이과대 교수 · 핵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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