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위원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압니다. 이 도서전은 이전에 없던 대규모의 문화교류라 평을 받고 있습니다. 책임자로서 이에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번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단순한 책의 매매를 넘어서서 한국의 지적 역량을 발휘하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현재 30여개의 큰 프로젝트들이 준비되고 있으며 이를 세분화하면 100개가 넘습니다. 한국은 외국과 대화가 많은 편이 아닙니다. 주변의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과도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지 못합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우리나라는 주빈국(主賓國)으로 초청됐습니다. 이것은 독일이 우리나라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문화적 코드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열리는 이번 도서전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스스로의 문화를 풍부하게 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유럽과 한국의 대화의 장이 확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필수도서목록을 만들어 이를 생활기록부에 반영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교양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도 스스로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강요에 의해 독서 습관을 만드는 것보다는 스스로 독서하는 생활을 권하고 싶습니다.
교양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허나, 교양교육을 스스로 하는 여유 또한 갖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압력을 가할수록 공부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과제로 부여하는 것과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후자가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적 발달을 이뤄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독일 학자가 “책을 많이 읽게 하려면 그에게 책이 많은 환경을 조성해 줘야한다”고 말했듯이 자유로이 ‘방목’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독서량이 상당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만의 독서법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문제 중심의 독서를 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에 따라 다분야의 서적들을 탐독하는 것입니다. 영문학이면 영문학, 현대정치면 현대정치학처럼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사회에 대해 문학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갗에 있어 시, 풍자, 소설에 관한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 등의 다양한 견문이 필요합니다.
강에 다리를 놓을 때 다리의 기능뿐만 아니라 물의 흐름, 필요한 노동력, 그리고 거주자에게 끼치는 영향 등을 고려하듯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 독서법도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젊었을 적에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졌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현실의 사회적?정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아쉽습니다.
독서를 바르게 하려면 도서를 읽은 다음에 내용을 요약, 반성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를 잘 실천하지 못했지만, 학문을 탐구하는데 있어 이런 능동적인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상매체의 발달이 독서 기피현상을 낳았다고 합니다. TV, 영화, 사진 등과 차별화된 독서만의 효과가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교양의 핵심은 독자의 마음계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서적의 내용이 내 마음에 한번 와닿았다가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명상과 좌선을 통해 마음을 성숙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독서는 인격적 숙성능력을 가집니다. 독자는 자신의 마음에서 작가가 제시한 것에 대한 시비와 원인, 그리고 논리적 근거 등을 분별해 받아들입니다. 이런 작용은 영상매체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상매체는 수동적인 수용입니다. 독서는 지금 인터뷰하면서 찍고 있는 사진처럼 일시적이고 쉽게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정보 습득 면에서도 독서를 능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책을 통한 인간 사이의 연결은 디지털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반성적 존재입니다. 그 자기반성은 책과 자신과의 상호작용과 타인과의 학문적 토의 속에서 가능합니다. 인터넷을 이용해 방대한 정보를 습득하면서 이를 독서의 대안으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모니터 속의 정보는 수동적인 정보 습득만 가능케 합니다. 또한 훑어지나가듯이 보는 전자글들은 능동적인 사고의 기회를 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이 민주주의 향상에 절대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예로 e-mail을 통한 사회 구성원들의 의견 종합은 성사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의견의 종합은 토의를 통해 이뤄집니다. 토의는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나눌 수 있게 합니다. 다른 시각을 가진 의견들의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e-mail을 통한 의견 전달은 어떤 의견이 주도적인지 알기 쉽게 하겠지만 그 의견들을 종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한국문학만이 가지는 특색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한국문학은 아직 세계적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가지는 문제 지평이 세계에서 보는 문제 지평과 다르다는 것이 원인입니다. 현재 사회에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문제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남북통일과 관련된 작품만 보더라도 절대적으로 작가가 가르치려는 경향이 짙습니다. 또한, 유교적인 전통의식을 밑바탕에 깔아놓은 작품들도 상당수입니다.
이 같은 경우 모든 인문적·윤리적 판단에 있어 권선징악적 성격을 가진다는 강점이 있습니다만 이런 의식이 다양한 시각을 막아 세계적 수준의 문학작품을 창출해 내는 데 문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Please'이란 단어는 “제발 무엇을 해주세요”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고 권유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작가가 절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끝이 열린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려 한다면 좀 더 좋은 문학작품이 탄생할 거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현대사회에서 추상적인 도덕 개념이 통용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과 구조적 틀에 맞는 도덕이 필요하다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내가 회의(懷疑)를 가지는 건 원리주의에 입각한 도덕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선과 악을 자로 줄긋듯이 구분할 수 없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예로 간단히 들어봅시다. 테바이의 왕녀 안티고네에겐 폴뤼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란 두 명의 남자형제가 있습니다. 폴뤼네이케스가 외국 군대와 함께 테베를 치려했고, 두 사람은 전쟁 중 사망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테베의 왕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겐 후한 장례를 치러준 반면 폴뤼네이케스에겐 그 시체의 매장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왕의 명을 어기고 혈육의 장례를 치러줍니다. 이 이야기는 사회적인 정의와 개인적인 정의가 부딪히는 경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과 악이란 단순한 도덕적 감성에 의해 상대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 외국 주도의 학문에서 벗어나 우리 학문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생담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가 처해온 상황에서 우리의 진실을 밝히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서 우리 것이기에 좋다는 의식은 경계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이 처한 현실은 서양 현실과 유사합니다. 그러기에 서양 학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갗라는 문제는 학문의 공통적인 문제로 이것은 자생담론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학창 시절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저는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대학을 다녔습니다. 제가 입학할 당시는 남한과 북한이 휴전한지 일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사회는 혼란했었고 학교 시설은 상당히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악조건이 학문에 대해 진지하게 임할 수 있게 했습니다. 나는 서울대 영문학과를 다니면서 스스로 공부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지금 대학생들이 고민하고 있는 취업 걱정은 그 때 당시만 해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학문에만 열정을 쏟았습니다. 아마 ‘사회 엘리트라고 할 수 있으니까 졸업 후 취업 문제는 어떡해서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데모도 동아리 활동도 없었습니다. 단지 문학회가 있는 정도였습니다. 이 때 학내에 정치가 부재했기 때문에 캠퍼스 내에 자유롭게 공부하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봅니다.

△고려대학교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앞으로 국내 대학이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적으로 고려대학교는 자기혁신을 가장 열심히 하고 있는 대학이라 생각합니다. 대학이 지금보다 발전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합니다. 지금은 대학학문이 직업교육의 일환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이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탐구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신입생을 선발할 때 우수한 학생을 입학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우수한 학생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수학에서 뛰어난 학생, 영어에서 뛰어난 학생, 이 외의 학문분야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을 어떻게 분별할 지가 난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선발에 있어 발생하는 우연적인 요소를 인정하고 다양한 선발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입학정원에 맞게 학생을 뽑되 교과과정을 진행하면서 그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교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십시오 .
-시간관리를 잘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문을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가 말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자기를 돌보는 방법입니다. 이 말을 다르게 얘기하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갗에 대한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이라 이런 고민을 계속한다는 것이 다소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길 바랍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있습니다. 이를 선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선택을 현명하게 하려면 학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교 학생들이 학문에 열성적으로 임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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