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9일 일요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4만명의 노동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최저임금제와 8시간 노동 등을 요구하며 왕궁을 향해 평화적 시위를 하던 이들에게 군인들이 발포를 한 것이다. 이것이 ‘피의 일요일’로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시작이었다.

20세기 초, 심각한 경제공황으로 인한 농촌 경제의 파탄과 열악한 노동환경 등으로 러시아는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지주계급들은 1900년 이후 세계 곡물가격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토지가격과 임대료를 올리며 농민들의 숨통을 조여왔다. 당시 농촌 사회에는 “농민들 사이에 분배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족함 뿐”이라는 말이 퍼지고 있을 정도였다. 노동자들의 생활도 이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노동법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였으며, 10시간에서 15시간에 달하는 노동시간에 비해 임금은 턱없이 낮았다. 한마디로, 노동계급은 아무런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산업종사자와 자영업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여성 노동자들은 이중의 차별을 받았다. 또한, 러시아 내의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 사이에서도 사회·경제적 불만이 지역 민족주의와 결합되면서 혁명의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내의 혼란들은 몇몇 최상위 계급을 제외한 전 계급의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이것이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뽄(Gapon)신부의 지도 아래 이뤄진 1월의 운동은 대량학살로 끝을 맺었다. 니콜라스 2세(Nikolas II)는 시위대를 반란자로 다루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에 코자크(Cossaks)기병대는 시위대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광장을 채운 수많은 시체와 신음하는 부상자들 속에서 가뽄 신부는 “더 이상 신은 없다! 더 이상 짜르는 없다!”며 울부짖었다.

‘피의 일요일’ 이후 흑해 함대의 포템킨(Potemkin)호에서 수병들이 선상반란을 일으키는 등러시아 전국 각지에서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운동이 계속됐다. 이에 니콜라스 2세는 완전한 시민적 자유 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으며 이로써 제1차 러시아 혁명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의 △계급차별 △시민적 불평등 △전제정권 등 혁명을 불러온 원인 중 어느 하나도 해소되거나 해결된 것이 없었다. 결국 1905년의 혁명은 실패한 변혁운동으로 기록됐으며 민중들의 의식성장과 소수민족들의 민족운동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레닌은 1905년을 1917년에 일어난 좀 더 큰 혁명의 ‘총연습’이라 불렀다. 많은 희생으로 시작했지만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제1차 러시아 혁명은 그 후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정신은 여전히 남아 현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지배질서의 모순 속에서 민중들이 가야할 길들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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