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학생들에게 靑鹿派의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조지훈선생은 실상, 1948년부터 1968년까지 20년간 고대 국문과에 재직하였던 교수요 학자였다. 필자는 학부 4년간의 스승이었고,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선생이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고 보니, 남다른 감회가 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선생의 고대 재직 중 교수로서의 행적과 업적, 그래고 필자가 제자로서 느낀 선생님의 모습을 이야기하려 한다.

본교에 부임하게 된 계기

선생이 고대에 처음 부임한 것은 1948년이었다. 1946년 창설된 국문학과에는 이미 具滋均, 金亨奎(곧 서울대로 옮겨감) 두 분 교수가 있었는데, 지훈과 金春東선생이 더 들어오셨던 것이다. 그 때 선생의 나이 28세. 상당히 빠른 셈이었고 그 배경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당시 문과대학장인 철학과의 李鐘雨교수는 어느 좌석에서 당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좌우익 文人들의 論戰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해박한 철학, 사회과학 지식으로 예리하게 논리전개를 개진하는 젊은이를 발견하였고, 그가 시 쓰는 조지훈이란 사실을 안 다음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그 후 이종우학장은 국문과의 구자균교수에게 청을 넣었고, 구선생은 곧 대구사범부터의 제자였던 학부생 金宗吉(현 영문과 명예교수)을 시켜 성북동의 조지훈선생댁을 방문, 교수 부임의 청을 전달하게 된 것이다(1948년 가을). 그 때 임무를 맡았던 김종길에 의하면, 제의를 받은 선생의 태도는 자신은 학벌도 미미하고(그는 東大 전신 惠化專門 출신이었다) 高大와 인연도 없는 터라면서 담담한 태도였다 한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10월 고대에 부임하였고 이후 20년간 교수로 근속하게 된다.

 
선생은 부임 당년, 「高大新聞」8호부터 편집겸 발행인을 맡았고, 또 동년 「高大演劇部」 지도교수를 맡아 金京鈺, 崔彰鳳 등과 함께 고대연극 활성화의 초석을 놓는다. 그러던 차 1950년 북한의 남침을 맞게 된다. 그 때 「絶望의 日記」란 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6월26일

오후 2시

고려대학교 3층에서 時論을 얘기한다

의정부 방면의 총성이 들려온다

교정의 스피카에서 戰況報導가 떤다

(중략)

삶과 죽음의 공포에 누가 흔들리지 않는다하랴마는 “더럽게 살지 말자, 더럽게 죽어서는 안 된다”이 志操를 배우는 이의 자승자박이여

내 오늘 그 힘을 입어 죽음 앞에 나설 수 있음이여

(하략)


6월 27일 가족과 결별한 선생은 28일 다리가 끊어진 漢江을 어렵게 도강, 남하 끝에 8월 대구에 옮겨 온 대학과 합류, 피난지에서의 수업을 맡는다. 그러다가 9월 28일 북진하는 國軍을 따라 종군작가단에 참여, ‘창공구락부’(공군)의 단장으로 전선에 뛰어들어 서울에 귀환한 뒤, 이어 파주, 38선을 넘어 평양에 입성한다. 시 「浿江無情」은 그 때 얻은 것이다. 다시 高大로 귀환한 선생은 1955년 高大開校 50주년을 맞아 兪鎭牛총장의 당부로 현 고대의 校歌를 짓고, 같은 해 「高大文學會」의 지도교수로서 학생 林鍾國, 朴喜璡, 閔在植, 玄在勳 등과 함께 「高大文化」 창간호를 낸다. 이어 당시 李承晩 독재정권에 날카로운 필봉으로 저항하던 선생은 1960년 4·19혁명을 촉발한 4·18 고대의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고대신문, 238호)는 당시의 감회를 읊은 것이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 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중략)

아 自由를 正義를 眞理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선생은 그 후 저 유명한 4·18기념탑 비문, 1965년 虎像에 건립기념시를 남긴다. 그리고 1963년에는 이전의 「한국고전국역위원회」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民族文化硏究所」를 창설, 초대 소장에 취임하여 오늘의 거대한 「民族文化硏究院」의 주춧돌을 세우고, 한국 최초의 분류사 『韓國文化史大系』의 거질을 내는 등 활약하시다 아쉽게도 1968년 5월 永眠하신다.



제자가 본 교수 조지훈 선생의 모습  
 

다음으로 제자가 본 교수 조지훈 선생의 모습을 다음 세 가지로 간추려 말하기로 한다.

 

첫째, 선생님은 휴강이 많은 교수였다. 그건 호흡기계 질환이 있으셨던 터라 몹시 숨 가쁘신 탓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한 학기에 90분 짜리 3시간으로 끝난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開講, 續講, 終講으로 한 학기를 마치는 셈이어서 필자는 선생을 ‘三講’선생이라 명명하고 너무 휴강이 많다고 불평하는 하생들을 다독거렸다.

둘째, 선생님은 아는 것이 많은 교수였다. 강의 시간이고 酒席에서고 그의 해박하고 심오한 지식과 학문은 예의 遠辯으로 실로 河海처럼 흘러나왔다. 그래서 선배들이 선생님을 ‘知多’선생이라 불렀는데, ‘知多’앞에 선생님 姓을 붙여 읽으면 좀 민망한 말이 되었으나, 실은 선생님 스스로 이 사실을 알면서도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자랑하는, 그런 분이었다.

셋째, 선생님은 酒道에 달관한 분이었다. 스스로 16세부터 시작했다는 그의 酒歷도 만만치 않지만, 酒量, 酒道에 있어서도 단연 발군의 실력이어서 당시 高大 文科大 술문화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酒席에서의 흐트러지지 않고 좌중을 이끄는 매너와 재담과 해학을 통한 분위기의 조성, 그러면서 주정이나 실수가 없이 술자리의 군기를 잡는 데도 엄격하여 선생에게 따귀를 맞은 시인이나 제자가 적지 않았다. 몇 년 전 어느 잡지에서 ‘한국의 酒仙 10걸’을 10여 명의 명사들의 천거로 뽑은 바 있는데, 선생이 당당히 3위에 랭크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선생님이 高大를 떠난 지 34년. 그러나 선생이 지은 ‘교가’, ‘응원가’, ‘친선의 노래’, ‘虎像 건립 時’, ‘4·18기념비의 비명’등으로 선생님은 영원히 고대에 살아있는 高大의 詩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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