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4세가 뭐예요?”
“음.. 예를 들자면 할아버지가 1세, 아빠가 2세, 니가 3세..나중에 네가 자라서 자식을 낳으면 그 애가 4세가 되는 거야”

람세스 4세의 조각상 앞에서 엄마가 아들의 질문에 답해주고 있다. 향료 단지 두 개를 들고 무릎을 꿇고 있는 람세스 4세를 보던 어린이는 신기한지 이것저것 질문한다. 느긋하게 관람하시는 노부부, 휠체어 탄 소녀, 손잡은 연인들, 지루해하며 딴청피우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은 아빠, 외국인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눈에 띈다. 사전에 인터넷사이트나 신문 등을 통해 관련 자료를 미리 접한 사람들은 일행에게 설명하기 바쁘고, 곳곳에서 들리는 감탄사는 유물의 가치를 짐작케 한다.

대영박물관 한국전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됐다. 평일 오후라 사람들이 별로 없으리라 예상했으나, 예술의 전당 입구에서부터 아이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이에 이번 전시를 기획했던 김한수 홍보실장은 “하루 평균 2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찾고 주말에는 5000명 가까이 된다”며 “관람의 편의를 위해 주말에는 입구에서 인원제한을 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또 전시실이 대체로 어두운 편이었다는 질문에는 “대영박물관에서 요구한 조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해 전시품에 따라 명암조절을 했다”고 답했다. 이번 전시회는 ‘세계 문명, 살아있는 신화’를 타이틀로 4월 12일부터 7월10일까지 열리며, 대영박물관 유물 700여만점 중 335점(진품 333점)을 선보인다.

대영박물관의 진면목을 한국에서 본다는 기대를 안고 들어가자 제1실인 ‘대영박물관 역사관’이 나타났다. 레닌의 필체가 쓰인 대영박물관 도서실 방명록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30년동안 매일 이곳을 찾았다는 칼 마르크스의 서명도 볼 수 있었다.
‘이집트와 수단관’에는 미라, 화려하게 채색된 관, 우리나라 영정사진과 흡사한 미라의 초상 등 죽음과 관련된 유물이 많았다. 이는 사후 죽음의 신 오시리스에 의해 심판 받는다고 생각했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대영박물관에서 가장 큰 인기를 누리는 유물 중 하나인 <불행한 미라>는 화려한 색채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미라 관을 가져온 네 명의 영국인을 비롯해 관계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요절했거나 부상당했다는 안내판을 볼 때는 순간 오싹해졌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유물을 모아놓은 ‘고대 근동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약 4600년 전 만들어진 <푸아비 왕비의 수금>이었다. 금제로 된 황소머리 장식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부터 나왔다. 발굴 당시 순장된 희생자의 유체가 옆에 놓여 있었고, 그 중 한 여성의 손이 수금의 현 위에 놓여있었다는 말을 듣자 현에서 그 여성의 손길이 느껴지는듯 해서 순간 숙연해졌다.

이번 전시회의 특징 중 하나는 미라, 조각, 판화, 의류(직물), 주화 등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주화와 메달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왕 <필리포스 2세의 금화>에서부터 1261년 중앙아시아 <훌라구 칸의 디나르>까지 시대를 망라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유럽문명의 원천이 됐던 ‘그리스, 로마관’으로 가자 중앙에 보통 사람크기인 1.71m의 디오니소스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넝쿨과 포도송이는 한눈에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임을 알아보게 했고 왼쪽 어깨와 앞 뒤, 왼쪽 팔위에 드리워져 있는 망토는 섬세하게 조각돼 있었다. 밑에는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말의 유래까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아프리카?아메리카?오세아니아관’에는 멧돼지 털장식이 인상적인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가죽 옷>을 비롯해 일상생활작품이 주를 이뤘는데, 색채나 표현이 우리나라 민속품과 비슷해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또 대부분 식민지 시절 정복국가에 의해 약탈당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대영박물관은 종합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타 박물관에 비해 회화작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이번 한국전에서도 공예, 조형물 위주로 전시됐다. ‘프린트와 드로잉관’은 회화 작품을 모아놓은 유일한 전시실이었다. 우울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판화에 담아낸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1>앞에는 사람들이 특히 많이 몰려있었다. 그 외 다 빈치의 <대머리 남자의 옆얼굴>, 렘브란트의 <자화상>, 라파엘로의 <서 있는 수염난 남자>등 천재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었다.

‘선사시대와 유럽관’에 전시된 유물은 61점으로, 다른 전시실에 비해 많은 편이었으며, 청동 및 철이 주 소재였다. 영화 ‘해리 포터- 마법사의 돌’에 영감을 줬다는 <3종류의 체스 말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그 앞은 어린 관람객들로 붐볐다. 
'

아시아관'에는 중국과 한국, 일본, 인도와 이슬람세계의 유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체제공의 초상화>를 비롯해 우리나라 작품도 고려청자 2점과 조선시대 초상화 2점이 전시돼 있었는데, 여러 문명사의 유물을 둘러보고 난 뒤 우리나라 유물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이젠 영국의 소유가 돼 한국 순회전을 통해 봐야하는 현실에 화가 나기도 했다. 2000년에 대영박물관에 신설된 한국관에는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백자 등 조선 후기 미술품 25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나라도 이제는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세계 각 국에 있는 여러 나라 박물관 및 미술관 등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찾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이뤄지고 있단다.

아시아관을 끝으로 어두운 전시실을 나오자 기념품 매장이 보였다. 시간을 보니 1시간 반 정도 지나있었는데, 마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여행을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다만 다양한 유물이 비교적 좁은 공간에 밀집돼 있어 여유를 가지고 관람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하지만 선사시대부터 근대기, 오대양 육대주 문화권을 망라해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며 예술의 전당을 나왔다.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