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 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1960년 4월 18일 12시 30분경 본관 앞에서 <4?18 선언문>이 낭독된 후, 약 3000여명의 재학생들이 ‘기성 정치인 각성’, ‘마산사태의 책임자 처벌’, ‘경찰의 학원출입 엄금’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는 역사적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데모대 학생들은 정치깡패들에게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구타당했다. 다음날 40여명의 본교생들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신문기사가 피해 현장의 사진과 함께 일제히 보도됐고, ‘4·18 고대생피습사건’은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1962년에는 5·16 쿠테타 이후 최초의 정치적 학생시위였던 한미행정협정촉구 시위가 일어났다. 본교생 28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그 중 13명이 구속됐다. 1964년에는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3·24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박정희 하야 요구로 확대된 6·3항쟁으로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서울 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해 본교는 4일부터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학생·교수의 출입이 금지됐다.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이 결국 체결되자 4월 13일 이후 끈질기게 시위가 계속돼 6월 22일에는 조기 방학이 실시됐다. 그해 8월 21일 개학하자마자 비상학생총회를 가진 본교생들은 24일 가두시위를 했는데, 25일 무장군인들이 본교에 난입해 본교생들에게 총대와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에 본교 교수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항의문을 발표했지만 다음날 무장군인 200여명이 또다시 난입해 학생들을 연행했다.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휴교령을 내린 정부는 ‘정치교수’, ‘정치학생’에 대한 징계지시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휴교령을 내렸고 15일만인 9월 20일에 해제됐다.

1969년 6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는 ‘3선 개헌’ 반대 열풍에 휩싸여 18차례의 데모가 있었으며 임시휴교조치가 잇따랐고, 1971년 위수령사태, 1972년 10월 유신, 1973·74년은 유신 반대시위로 휴교령이 끊임없이 내려졌다. 1975년 4월 8일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본교생들의 격렬한 반유신투쟁에 대해 긴급조치 7호를 발동해 본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당시 김상협 총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고 5월 19일 41일간의 휴교를 마치고 개강했지만 이후 총학생회를 비롯해 모든 학생 자치활동기능이 정지됐다.


10·26사건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총학생회 부활과 학원 자율화·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5·18 광주 민중항쟁의 여파로 5월 17일부터 9월 10일까지 116일간 휴교령이 내려졌고, 9월 5일 반공을 앞세운 학도호국단이 재조직됐으며, 교내에 사복경찰이 상주해 학생들을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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