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가 보는 박제가권세있는 자를 바라보고는 더욱 소원해진다. 스래서 알아주는 이가 적고 언제나 가난하다. (중략) 바야흐로 고명한 이와 마음을 논하고, 세상 일은 돌보지 않는다.-소전(小傳)-
금년은 박지원(朴趾源)과 박제가(朴齊家)의 서거 200주년 되는 해다. 실로 두 분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사유를 성숙시킨 사상가이자, 민족문학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린 문학가였다. 두 분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개혁하는 데 필요한 것은 수용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사상을 주장하였다. 민족의 문화와 경제 상황을 동아시아의 현실에 비추어 객관적으로 고찰하였으며, 갖가지 혁신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지배층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박지원과 박제가는 연령의 차이를 잊은 친구 사이로 지냈다. 19세의 박제가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박지원은 옛 친구처럼 손을 마주잡았고 자신이 그간 지었던 글을 꺼내 읽어 주었으며, 몸소 쌀밥을 지어 주고 축수하며 술을 부어 주었다. 뒷날 박지원은 박제가의 <초정집>에 서문을 써서, 문장을 짓는 전범으로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화를 알고, 새것을 만들어내되 전범을 지키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주장이다.

박지원(1737∼1805)은 자(字)가 중미(仲美)이고, 본관은 반남이다. 연암(燕巖)이라는 호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20대에 문학으로 이름이 났지만, 과거 응시의 뜻을 버리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였다.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등 당대의 지성들과 당색을 따지지 않고 깊이 사귀었다. 1780년(정조 4)에는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절로 베이징(북경)에 갈 때 따라가, 남만주와 중국 북부를 돌아보았다. 그 뒤 3년 동안, 여행 때의 견문과 기록, 관련문헌을 정리하여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엮었다. 1786년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이 된 뒤,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거쳐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69세 때인 1805년 10월 20일 서울 가회방 자택에서 별세했다. 저서로는 <연암집>과<농소초>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가 있다. 젊은 시절에 <방경각외전>으로 엮은 '예덕선생전','민옹전','광문자전','양반전'과 <열하일기>에 수록한 ,허생 호질) 등은 사실주의의 소설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연암집>과 <열하일기>에는 교조적인 주자학에 대해 회의하고 자유로운 사유와 예술을 추구한 박지원의 지향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문체는 너무나 변환이 많고, 강인한 힘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정조는 그의 문체가 당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였고, 박남수란 인물은 박지원이 낭독하던 <열하일기>를 촛불에 태워버리려고 하였다. <열하일기>는 과연 보통의 ‘일기’가 아니다. 하루 일정을 적는가 하면, 단형의 예술적 산문을 삽입하여 두었고, 우리나라 정치문화와 동아시아 정세에 관한 논증들을 실어두었다. 글 전체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면서도 각 부분이 독립되어 있으며, 심지어 논증의 글에서도 박지원의 육성을 들을 수가 있다.
   
박지원은 생활과 사물이 공간-시간의 일회성 속에서 지니는 모습을 포착하고자 노력하였다. 박지원은 여러 글에서 생활과 사물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며, 생활과 사물의 현현은 ‘일회성’을 지닌다는 점을 말하였다. 그 일회성은 곧 기성관념에 의해 재단되지 않기에, 생생한 묘사를 통해서 전달된다. 그렇기에 박지원의 산문은 ‘묘사’의 수사법을 발달시켰다. 박지원은 젊은 시절 꿈에, 관청건물 같은 곳에서 화병에 꽂힌 길고 푸른 새의 깃털을 본 기억을 회상하고, 실제로 중국에서 공작새를 직접보고 그 깃털 색깔의 변화무쌍함을 서술하였다. 공작새 깃털의 색깔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깃털 빛의 변화를 매우 감각적이고 현란하게 묘사하였다. 이것은 공작관이 동일한 방안에서 다른 경치를 볼 수 있고 자리를 옮기는 대로 볼거리가 바뀌는 것이, 마치 공작새의 깃털 색깔이 빛의 각도에 따라 깃털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다는 것을 비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객관 사물은 인식 주체의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으며, 인식 대상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에 박지원은 주목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하였다. “빛깔을 논하면서 마음에 먼저 색깔을 정해 놓는 것은 올바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한편 박제가(1750∼1805)는 북학사상을 담은 <북학의(北學議)>로 저명하다. 자는 차

   
박제가가 보는 박제가권세있는 자를 바라보고는 더욱 소원해진다. 스래서 알아주는 이가 적고 언제나 가난하다. (중략) 바야흐로 고명한 이와 마음을 논하고, 세상 일은 돌보지 않는다.-소전(小傳)-
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호는 초정(楚亭)이다. 서얼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서·화에 뛰어나 일찍부터 이름이 높았다. 1778년에 박제가는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청나라 학자들과 토론하였고, 1779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되어 그 뒤로 13년간 규장각의 내·외직에 근무하였다. 1786년에는 '구폐책(救弊策)'을 지어, 신분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장려를 주장하였다. 순조 원년인 1801년, 네 번째로 베이징에 파견되었는데,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1805년에 풀려났지만 얼마 안 있어 별세하였다. 저서로는 <북학의> 이외에, 문집인 <정유집(貞?集)>이 있다. 

박제가의 시와 산문에는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참신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많다. 이 점은 박지원의 산문과 필적한다. 또한 박제가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쳐 불우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드러내거나 사회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매우 솔직하고 담대한 것이 그 특징이다. 회화적으로 장면을 묘사하거나 내면 정서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독특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박제가의 문체는 마치 현대문학을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쌍벽을 이루는 중국기행문이요 사상서이다. 박제가는 이 책을 1778년(정조 2)에 내편·외편의 2편으로 엮었다. 내편은 차·선(船)·단(簞)·계체·도로·교량·시정(市井)·상고(商賈)·전(錢)·여복(女服)·약·당보(塘報)·고동서화(古董書畵)·궁실·목축·시가(市價)·금철(金鐵)·재목·장희(場戱)·어역(語譯)·성벽 등 39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내편은 당시의 문화와 경제생활을 개선하려고 생활도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한 것이다. 외편은 전(田)·분(糞)·상(桑)·농잠총론·과거론·녹제(祿制)·재부론(財賦論)·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장론(葬論)·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관론(官論)·병론(兵論)·북학변(北學辨) 등 17개 항목의 논설을 수록하였다. 외편은 곧, 농업기술의 개량, 국내 상업, 외국 무역의 이점을 설명한 것이다. 박제가는 특히 수요 억제나 절약·검소만이 최선이 아니라 생산을 확대하여 물자를 충분하게 공급하고 유통을 원활하게 해야 한다는 선진적인 경제관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리민복을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언젠가 박제가는 박지원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송석운룡도가. 장난스레 연암을 위해 짓다(松石雲龍圖歌 戱爲燕巖作)'라는 장편시로 묘사한 일이 있다. 박지원의 풍류는 이러하였다.
  
燕巖先生好奇古  연암선생은 기이하고 예스러움을 좋아하지
解衣盤?燈前舞  옷 풀어 젖히고 등잔불 아래 춤을 추더니만,  
酒?大呼疾墨磨  술기운 거나하자 먹을 갈아라 소리 치곤  
碗水羅列銅斗側  물 대접 늘어놓고 청동 되를 기울이네.
     但聽筆聲走  쓱쓱 붓 달리는 소리만 들릴 뿐    
似有神來停不得  신들린 듯해서 멈출 수가 없을 정도.
   
박지원이 그림을 그리고 붓을 던지자 좌중은 그 신묘함에 탄복하여 말을 잊고 말았다. 

搖曳故令生長風  흔들흔들 몸 움직여 짐짓 긴 바람을 일으키더니
?然擲筆氣如虹  쟁그랑 붓을 던지매 무지개 기운이 뻗고, 
滿堂賓客寂不語  방안 손님들은 아무 말 없이 조용하고 
惟有小燭搖殘紅  오로지 작은 촛불만 붉게 가물거리네.
君不見          그대는 못 보았나
公孫舞劍悟艸書  공손대랑 검무를 보고 장욱이 초서의 묘경을 깨친 일을.
我今作詩懺未工  나는 지금 시를 짓고는 솜씨 없어 부끄럽다네.
          
박제가는 장욱(張旭)이란 인물의 고사를 끌어다가, 자신은 그에 비해 창작의 재능이 모자란다고 하였다. 겸손이다. 그들은 신분과 나이를 잊고 서로의 예술세계를 공유하였던 것이다. 이런 만남이 또 있을까.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한문학을  공부할 맛이 난다. 그들의 <열하일기>와 <북학의>는 사유의 흐름을 견고하게 막고 있었던 방벽들을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최근 10년간 대학원과 학부 과목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강의하면서, 기존의 번역본보다는 더 충실한 형태의 주석본을 간행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박지원의 글은 되읽어도 정말 멋지다. 박제가 또한 그러하다. 

심경호(문과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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