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화된 고물상

고물상이라고 하면 리어카 한 대를 끌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물을 수거해 가는 장면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요즘은 고물상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수집 루트도 체계화됐다.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서 쓰레기나 재활용품을 분리수거해 배출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고물수집상들이 찾아든다. △헌옷 △신발 △종이류 등이 가정에서 주로 배출되는 물건들이다. 식당이나 사무실들을 철거할 때에는 △고철 △스테인리스 △장판 등이 많이 수집된다. 자칫 쉽사리 지나칠 수 있는 쓰레기통에서도 △유리병과 △빈 캔 등 건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

1㎏당 신문은 80원이고, 책은 110원, 종이박스는 65원이다. 고철 중에서는 구리(銅)가 제일 비싼데, 1㎏에 1700원정도 하고 알루미늄샤시도 1250원이다. 이어 스테인리스와 양은의 순으로 가격이 매겨 진다. TV나 냉장고같은 고장난 가전제품은 중고 전자제품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중간상인들이 고물상에 상주해 있다가 가져간다.

도시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면 수집원이 가까이 있어 좋지만 힘든 점도 있다. 가락 시영아파트 단지에서 고물상을 운영하고 있는 권오근 삼성자원 대표는 “고물들을 한 곳에 모아 두는 기계가 중장비라 소음이 심하고 먼지도 많아 지역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며 어려움을 설명했다.

서울 신림동의 김형일 서울고물상 대표는 고물상의 미래에 대해 “땅 값도 만만치 않고 주민들과 계속적으로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고물상들은 점점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규모도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라지는 간판그림

“아니, 이게 한가인이라고?”

영화 ‘말죽거리잔혹사’가 개봉했을 당시 한 극장에 걸린 그림간판이 온라인상에서 화제를 낳았다. 여주인공의 얼굴이 실제와는 전혀 다르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시내에는 그림간판을 쓰는 극장이 단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서 유일하게 그림간판을 쓰던 신촌 그랜드시네마도 올 1월초부터 실사간판으로 바꿨다. 실사간판은 환경오염을 이유로 사용에 제약을 받다가 김대중 정부에서 허된용 이후 그 수가 늘어났고, 극장들이 멀티플렉스 시설로 정비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그랜드시네마의 한 관계자는 “그림간판 하나를 제작하는데 500여 만원이 든다”며 “재정적 문제 때문에 그림간판을 내리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실사간판은 보통 하나에 7만원정도 의 비용이 소요된다.

지방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작년까지 그림간판을 써오던 충청북도의 명보극장은 올해 초 문을 닫았다. 강릉의 경원극장 역시 현재는 그림간판을 사용하지 않으며 혹 그림간판을 발견한다고 해도 실사처리하기 힘든 에로영화인 경우가 많다. 에로영화 같은 경우는 포스터가 아예 제작되지 않기 때문에 실사간판을 사용할 수 없다.

지난 42년 동안 극장간판화가 일을 해 온 최광식(남·63)씨는 현재 일을 그만두고 한 임대아파트의 경비직을 맡고있다. 최씨는 작년 4월, 20년동안 몸을 담았던 서울 ‘성남극장’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극장을 비롯 서울시내 9개의 대형 극장 외에도 수원과 인천까지 출장을 다니며 극장간판을 그렸었다. 또한 일을 배우겠다고 했던 젊은이들 또한 많아 4~5명의 견습생을 둘 정도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최 씨는 “요즘 사람들은 향수도 없고 추억도 없다”며 “내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림간판을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주산학원

과거 주산학원이 곳곳에 눈에 띄고 주산능력소양이 기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들어 주산학원을 찾는 이들이 눈에 띄고 있지만 ‘주산학원’이라는 간판을 찾기 힘들 뿐 아니라 주판도 큰 문방구에나 가야 살 수 있을 정도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국 규모의 주산경시대회가 활발히 열릴 만큼 주산에 대한 열풍은 대단했다. 회사의 경리로 들어가거나 은행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주산능력이 필수적이었다. 1970~80년대에의 주산교육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중요했다. 1970년대에 은행에서 근무했던 김복수(여·49)씨는 당시를 “주산은 기본적인 소양이었고 초등학교에도 가르쳤다”며 “주판이 없는 아이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주산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서서히 쇠퇴기를 맞았다. 컴퓨터가 각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계산기가 일반화 되면서 주판은 그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주판과 함께 주산학원들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주산학원도 대부분 ‘보습학원’이라고 명칭을 바꾸었으며 주산은 부차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신칠우 한신보습학원장은 “주산학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주산교육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며 “주산만 가르쳐서는 학원 운영이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신 원장은 학원을 처음 시작하던 당시에는 주산인구가 많아서 혼자 5~600명을 가르치곤 했다고 한다.

최근 주산이 암산능력과 기억력·집중력 확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다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학교성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개 저학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주산이 취미나 생업을 위해 교육됐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주산을 가르칠 젊은 교사들도 별로 없다. 신 원장은 “주산을 가르치는 교사들 대부분이 예전에 주산을 배웠던 나이 든 사람들이다”라며 아쉬워했다.

하나남은 성냥공장

라이터가 보급되기 전까지 성냥은 흡연,취사 등에 많이 사용되던 도구였다. 하지만 라이터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성냥의 수요가 줄어들어 성냥 공장들은 하나 둘 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경북 의성에는 국내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성냥 공장이 있다. 성광성냥 공업사(이하 성광성냥)가 바로 그곳이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문을 연 성광성냥은 현재 창업주 손진국(69세) 사장에 이어 아들 손학익(39) 상무가 운영하고 있다. 손 상무는 “지금은 뒷 산에 나무가 심어져 있지만 그 때는 성냥 축목을 만드는 원목들을 쌓아놓았다”며 50명이 넘는 직원들로 북적대던 옛 공장을 회상했다. 그리고는 현재는 20명 안팎의 직원이 남아있는 성냥공장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지게차도 없었고 인부들이 자기 몸의 두 배나 되는 원목을 직접 들어 4계절 내내 야간 작업을 해가며 깎았다”는 손 상무의 말에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현재는 생산되는 성냥의 90%가 광고 목적으로 사용되며 시판용으로 생산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도 중국에서 생산된 값싼 성냥을 가공해 파는 업체들에 밀려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손 상무는 “국내에 성냥 공장이 완전히 없어지고 나면 중국 기업들이 공급 가격을 올릴 것”이라며 정부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호 정책을 실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연 매출 3억 원으로 20여 명의 직원들에게 제때 임금을 지급하며 공장을 꾸려가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손 상무는 “마지막 남은 성냥 공장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조건 대형화를 외치며 큰 것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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