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에 조지훈 시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 중 살아 생전 가장 애착을 갖고 돌아가시던 날까지 걱정하던 곳이 바로 민족문화연구원이 아닐까. 국학이 천대받던 시절, 민족문학을 연구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많은 어려움을 딛고 본교에 민족문화연구원의 초대를 닦으신 조지훈 시인과 민족문화연구원의 이야기를 돌아가시기 전에 ‘민연을 살리라’는 유훈을 받았다는 홍일식 전 총장을 통해 들어본다.
 
▲민족문화연구원은 1957년 「한국고전국역위원회」로 창립한 후 1963년 민족문화연구원으로 개칭했다. 창립배경과 초창기 모습은.


- 그 당시 우리나라는 오로지 서구의 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고전에 가치를 두지 않았다. 총장 유진오 선생님이 1954년 하버드대 옌칭학회에 가서 백인들이 미국에서 논어, 맹자, 사서삼경을 원문으로 읽으며 연구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 그래서 우선 우리 고전을 국역해서 다음 세대가 알게 해줘야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바로 「한국고전국역위원회」이며, 1957년 이종우선생님이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그 때는 서관에 소장실 하나와 연구실 하나로 시작했으며 재정적 지원이 없어서 많이 어려웠다.

▲조지훈 시인이 민족문화연구에 남긴 업적은.

- 조지훈 선생님은 1962년 「한국고전국역위원회」3대 위원장으로 취임하신 후 단순히 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독창적 연구를 해서 후대에,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민족문화연구원」으로 개편, 확대했으며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해 착수해서 두 권까지 완성하신 후 돌아가셨다. 『한국문화사대계』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분류사로 토지제도사, 제지기술사, 군사기술사 등 1백20여 개를 분류해서 정리한 것이다. 당시 유진오선생님이 마스터플랜을 듣고 시인의 공상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할 정도로 누구도 엄두 못 내던 대단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일제 식민지 사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민족문화연구원이 고대에 차지하는 위상과 앞으로의 계획은.

- 조지훈선생님은 살아생전 한국을 찾는 사람은 고대를 보면 한국을 알 수 있게 하고, 고대를 찾는 사람은 민연을 보면 고대를 알 수 있게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민족문화연구는 중요하다. 예전에는 서구 학문을 모방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독자적인 한국학을 개척하고 우리학문을 정립하는 데 선두주자가 되야 한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조지훈 시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 선생님은 단순한 시인, 학자, 논객, 지사가 아닌 하나의 종합 인간이었고, 한국에서 보기 드문 모범적 지성인이었으며, 전통적 선비였다. 나아갈 때와 머무를 때, 물러날 때를 분명히 가릴 줄 알며, 지성의 분노가 무엇인지 보여준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지훈의 정신이 고대에서 더 선양되고 계승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학교 도처에 지훈의 체취가 남아있는데 지훈을 기리는 시비나 기념비 하나 없는 게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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