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관심이 높다. 세간의 몸짱 신드롬에서 학계의 몸철학에 이르기까지 전에 없던 이런 관심은 몸이야말로 이 시대의 화두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우리 사회의 이런 흐름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플라톤 이래 철학의 영역에서 끝없이 밀려나기만 했던 몸이 이제 다시 철학적 논의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컴퓨터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사이버 공간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이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몸이 학술적 논의의 중심 주제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이버 공간은 탈(脫)육체를 지향해 온 플라톤 형이상학의 끝으로 간주될만한데, 그런 가운데 또한 몸이 전부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다.

몸에 대한 담론이 풍성해진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절제와 생산을 미덕으로 여기던 고전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와 레저 중심의 사회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몸은 억제하고 옥죄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졌다. 이미 지난 1960년대부터 서구에서 불기 시작한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도 몸에 대한 관심을 부추겼다. 이 운동은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사회가 어떻게 여성의 몸을 학대하고 통제해 왔는지, 그리고 상업 광고나 포르노그래피에서 어떻게 여성의 몸이 오도되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제 더 이상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收之父母)'라는 사고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도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했다. 인공 장기의 개발은 몸이 더 이상 다른 사물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했으며, 돈만 있으면 성형수술을 통하여 자기의 정체를 상당할 정도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몸에 대한 급격한 의미 변화는 당연히 몸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성과는 아직 일천하다. 물론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미셀 푸코를 위시하여 노베르트 엘리아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어빙 고프만 등에 의하여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논의의 본질 자체가 서양적인 사유의 틀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이 점은 몸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활발해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명한 하나의 경향, 즉 몸과 마음 혹은 감성과 이성이라는 이분법이 사정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알다시피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유방식은 근대 서구 사유의 기본 골격이었다. 이에 비하여 이제 몸은 이러한 이원론을 통합하는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몸은 단지 물렁물렁한 살과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육체가 아니다. 그것은 외계 대상과 직접 부딪치는 물질적인 육체뿐만 아니라 세계를 감지하고 향수하는 정신 기능도 포함한다. 이른바 감정과 욕망뿐만 아니라 사유 과정도 몸의 개념에 속한다. 몸은 마음의 외피이며 마음은 몸의 내면이다. 따라서 물질적인 차원의 몸과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마음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에서 논의되며, 몸의 문제와 마음의 문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유방식은 인간의 무게중심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이전에 '동물'이며, 따라서 살아 있는 몸을 지닌 동물로서의 느낌이나 감정 또한 인간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죽은 자와 살아있는 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생기 있는 몸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놓여있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 철학에서 몸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일상의 삶이든 철학이든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인 한에 있어서는 '몸의 생각', 즉 느낌이나 감정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철학이 차갑고 정나미 떨어지는 '쇠붙이를 다루는 학문(鐵學)'으로 전락하게 된 것도 어쩌면 몸의 생각을 논의의 중심에서 밀어낸 결과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몸에 대한 담론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미 이와 관련된 논의의 본질을 왜곡하는 사고방식이 무성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젊고 예쁜 몸만이 진리요 선'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나는 젊고 날씬하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왜곡되고 있다. 과도한 의식성이 몰고 온 본질의 왜곡이다. 몸에 대한 담론의 본질은 억눌려온 몸의 해방을 통한 몸 마음의 균형과 조화이다. 결코 몸 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다. 몸철학은 얼짱 몸짱으로 웰빙을 추구하자는 게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균형 있게 발달해야 진정한 몸짱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야 아름다운 사람일 수 있다.

이거룡/ 동국대연구교수, 인도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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