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루쉰공원에 세워진 윤봉길 기념관 '매정'을 찾아온 한국 관람객들의 모습.
광복60주년을 맞아 문화일보와 국가보훈처가 주최하는 ‘광복60주년 기념 대학생 기자단 중국항일유적 탐방’ 행사가 개최됐다. 기자단은 본사 기자를 포함해 △대학신문 △연세춘추 △중대신문 등 총 26개 대학 학보사 기자들이 참여했다. 이번 탐방은 7월 31일부터 지난 5일(금)까지 5박 6일 동안 항일 운동에 힘썼던 애국선열들의 발자취를 찾고 그들의 정신을 되새겨보는 데 의의가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중국에는 중국 정부와 치열한 협상을 지속하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날 기자단이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찾아간 곳은 홍구공원이다. 홍구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일제의 전승기념 행사에 참석한 일본군을 향해 폭탄을 던진 곳으로 현재는 중국 근대 사상가 루쉰(魯迅)의 동상이 서있고 ‘루쉰 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루쉰 동상이 서 있는 자리가 당시 일제의 전승기념 행사장 단상이 있었던 자리이고, 동상의 바로 앞 잔디밭이 시작되는 곳이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자리이다. 김회연 상해 현지 가이드는 “1994년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지고 1997년에 매정이 세워졌다”고 설명했다. 매정은 윤봉길 의사의 사진, 글 등을 보관하고 있는 전시관으로 전문 안내원이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6년 3월 백래니몽 마당로 보경리에 마련돼 그 후 6년 동안 민족열사들의 활동 근거지가 된 곳이다. 기자단이 이 곳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한국에서 온 많은 방문객들이 청사를 둘러보고 있었다.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현재 보수 중이다. 1층에는 임시정부의 활동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하고 2~3층에는 당시 열사들이 사용했던 침구, 회의실, 김 구 선생의 가족사진, 독립신문 등을 전시해 놓았다. 이 건물은 옛날 임시정부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 기자단은 다음날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은 지린성 연변조선족 자치주 중부에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민족학교인 서전서숙, 동흥, 대성학교 등 교육기관이 세워지고, 3·13만세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민족이 혼란과 절망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자신의 시세계에 깊이 있게 담아낸 윤동주 시인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윤 시인은 함경도 전통가옥  구조를 가진 집에서 태어나서 15년간 살았다. 집 안에는 당시 시인이 혼자 생활했던 방과, 부엌 등이 그대로 복원돼 있었다.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명동교회가 있다. 이 곳은 역사 전시실을 겸해 문익환 목사, 안중근 의사 등 명동촌을 일궈냈던 인물과 명동학교를 나온 인물들, 항일운동 사실 등에 대한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내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는 유언을 남긴 김약연 열사의 기념비도 교회 바로 옆에 세워져 있다.

이 곳에서 차를 타고 30여분 거리를 가면 용정시 안의 또 다른 사적지인 3·13 반일의사릉에 도착할 수 있다. 이 능은 1919년 3월 13일 3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만세 운동을 하던 중 목숨을 잃은 14명의 열사 중 13구의 시신을 묻어놓은 무덤들이다. 최근갑 용정 3·13기념사업회 회장은 “3·13만세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북간도 지역의 3·1운동이라 불린다”고 설명했다. 이 곳을 관리하고 있는 최 회장은 “이 곳을 성역화 하는 작업에 많은 분들의 수고가 있었다”면서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보람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3·13 반일 의사릉은 1990년대에 들어서 목비를 세우고 주변정화작업을 시작해 한국 후원자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성역화 단계까지 성과를 거뒀다.

윤동주 기념관인 대성중학교를 거쳐 기자단이 도착한 곳은 청산리 전적지다.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일본군을 맞아 혁혁한 전과를 세운 전투며 독립군이 후퇴한 후에 이 일대의 주민들이 일본군에 의해 참혹히 살해당한 가슴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청산리 세워져 있으며 높이 17.6m, 너비 25m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의 구거지(舊居地)는 흑룡강성 해림시에 위치하고 있다. 김좌진 장군은 1928년 9월부터 1930년 1월 살해당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고 현재는 당시 사용한 정미소, 회의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 ‘ㄿ자 역자 방향으로 이뤄진 전체 집 구조에서 가운데에 위치하고, 흉상의 옆에는 장군의 생애를 기록한 반석이 있다. 김좌진 장군의 손녀 김을동(60·연예인) 씨도 사단법인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로 이곳을 찾아와 기자단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김 씨는 “이곳은 중국 내에 한 민족 열사의 동상이 버젓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유일하다”며 타국에서 민족혼을 지키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했다. 현재 중국은 우리나라가 하얼빈 역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세울 수 없도록 조치하고 있다.

해림시에는 오는 10월 18일(화) 개관 예정인 한중우의공원이 있다. 한중우의공원은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와 사단법인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중화인민공화국 흑룡강성 해림시 정부가 재원을 들여 마련한 곳으로 만주항일역사관과 백야관이 건설돼 있다. 만주항일역사관은 △한인의 동북이주와 독립전쟁의 준비 △3.1운동과 독립전쟁의 전개 △독립운동단체의 정비와 항일투쟁 △대륙침략과 한·중 양 민족의 항일 연대투쟁 등 1910년대부터 만주지역에 일어난 항일투쟁사를 기록해 놓고 있다. 김을동 상임이사는 “독립군의 혼과 정신을 후세에게 전달하는 교육의 장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고, 만주항일역사관의 전시를 맡은 박 환(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만주항일역사관은) 통일자향적 한중친선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국내외 최초의 만주지역항일운동 전시관이다”고 설명했다.

탐방 마지막 날 기자단이 방문한 731부대 유적지는 1939년 일본 육군참모본부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이 생물학 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세균배양실, 냉동실, 생체실험실 등을 갖추고 있는 이곳에서 많은 민간인들이실험대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들의 대부분은 중국, 한국, 러시아 인으로 실험의 희생자는 최소 3,000명 이상에 이른다.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면서 이곳에서 시행한 생체 실험의 증거들을 없애기 위해 폭파를 감행했다.

731부대활동은 제국주의에 물든 일본이 저지른 만행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중국 대륙에는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운 열사들의 흔적과, 제국주의에 물든 일본이 만들어낸 악행의 흔적이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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